학원에서 보낸 시간을 되새겨 보며, 정말 많은 인연이 오고 갔다.
이 중 아직까지 연이 유지되어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서로 안부를 묻는 이 들이 있는 반면 학원을 끝으로 우리까지의 연은 그다지 끈끈하지 못했구나라고 생각되는 이도 있다.
그 수많은 인연 중 유독 기억에 남는 학생들이 따로 있을까?
당연히 있다. 대부분 입시생들이다.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도 다양하다.
나의 메인 파트는 기타지만 시창청음 및 화성학 단체 수업도 진행했기에 학원의 모든 입시생은 나를 한 번은 거쳐야만 했다.
학생 S의 집은 동해 바닷가에 있는 작은 동네였다. 버스로 학원을 오려면 족히 1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였다.
중2 때 처음 상담 온 이 아이는 잘생긴 외모에 수줍은 말투였으나 어딘가 모를 반항기 가득한 눈 빛이 생생했다.
'중2병'이란 말이 한 참 유행할 때 중2 학생이 왔으니 어느 정도의 선입견을 갖고 나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막상 수업을 해보니 어리지만 진지한 태도에 살짝 놀랐고 깊이 있는 질문을 종종 하곤 해서 '가르쳐 볼 만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먼 거리를 힘들게 오가며 성실하게 레슨과 연습을 병행하며 중학교 생활을 나름 순탄하게 마쳤다.
고등학교는 시에 있는 예고로 진학을 했다. 학원도 가까워지고 주변 환경이 본인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과제나 연습에 불성실한 모습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레슨 때는 수업 보다 나의 잔소리와 질책의 시간이 길어졌고 S는 되지도 않는 변명의 시간이 길어져만 갔다.
그래도 내가 이 아이를 중2 때부터 봐 왔다면, 그래도 내가 음악 전반적인 것뿐만 아니라 부모님의 역할 까지는 아니더라도 살짝 먼 삼촌 같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자취를 하니 밥 같은 건 잘 챙겨 먹나 학교에는 똑바로 다니고 있는지가 제일 관건이었다,
다행히 이 둘은 별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이제 고등학교 2학년이고 진지하게 진로를 고민해봐야 할 시기였다.
"S야, 너 진짜 전공할 거야?"
"당연하죠.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요..."
"내 생각엔 말이야,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봐. 너 계속 이런 식으로 하면 아무 답도 없다. 게다가 지금으로선 네가 가고 싶은 학교 한 군데도 못 간다. 그냥 전공할 생각은 접고 다른 진로를 빨리 알아봐."
"그래도 시간이 좀 있으니까 열심히 하겠습니다."
"열심히 안 해도 된다. 나는 맨날 너한테 잘 좀 하라고 잔소리만 하고, 넌 맨날 앞으로 열심히 하겠다고만 하고... 이미 답은 나온 거 같은데. 상담 때 너희 어머니께 말씀을 드려도 뭐 나아지는 게 없으니. 굳이 레슨을 계속하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선생님. 절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포기는 무슨 포기? 내가 너한테 소홀히 한 적 있어? 내가 수업 준비를 안 해왔어? 그럼 너는? 가장 기본인 연습도, 시키는 과제도 안 해오고... 너도 알 거 아니야. 연습하라는 잔소리가 나오면 이미 끝이라는 걸... 그냥 취미로 하면 되는 거잖아. 세상 끝난 것처럼 생각할 필요 없다니까."
다행히 고2 끝무렵 S의 태도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중2 때 처음 봤을 때의 독기 어린 눈 빛은 없었다. 이 아이는 중학교 때가 본인 악기 인생의 전성기였던 것인가?
S는 본인이 희망했던 학교에서 다 떨어지고 한 군데만 남겨둔 상태였다. 마지막 한 곳은 대기 명단에 있었다. 이마저도 쉬워 보이진 않았으나 명단 상위에 이름을 올려서 나름 해 볼만했다.
다행히 합격. 한시름 놓았다.
S는 학원 역사상 아마 가장 안타까운 학생 중 한 명이 아닐까 싶다.
내심 기대가 많이 되던 친구여서 그랬다.
종종 카톡 프사로 해맑은 사진들을 번갈아 올리는 걸 보면 잘 지내는 거 같다.
학생 Y의 첫인상은 '예쁘장하게 생긴 여고생에 목소리도 개미 같은' 수줍음 많은 학생이었다.
문제의 '키보드 학원'에서 넘어온 무리 중 한 명이었다.
원장님이 보컬 선생님인지라 궁금해서 여쭤 봤다.
"Y는 좀 어떤 가요? 목소리가 개미보다 작고 그렇던데."
"생각보다 잘하네예."
학원 월말 발표회.
Y가 노래를 시작한다.
으잉? 반전이다. 이런 캐릭터와 목소리에서 이런 파워풀한 성량과 노래가 나온다고? 오랜만에 학생 중에 듣기 좋은 노래를 했다.
아마 학원에서 역대 탑급 보컬이지 않았을 까...
솔직히 Y는 학원보다, 대학 진학을 목표보다는 차라리 기획사에서 오디션 보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은 내심 아니라고 하지만 왠지 마음 한편에는 가수로 데뷔해 큰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모든 보컬생들이 이 같은 생각이 아닐까.
Y는 어느 날 급작스럽게 학원을 그만두었고 이유는 그냥 학업에 전념하겠다는 것이었다.
부모님께서 직접 오셔서 하신 말씀이고 Y도 그렇게 얘기했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이 녀석은 처음과 끝이 반전이었다.
그러고 얼마 후, 티브이에 오디션 프로 하나를 보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과 목소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 마이 갓, Y다!
오디션 프로에서 제법 높은 순위까지 오르고 끝이 났지만 들려오는 소문은 어디 기획사 들어가서 데뷔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러고 몇 년 후, 한국에서 탑급의 실용음악과에 재학 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결국 돌고 돌아 본인의 목표를 이루었으니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
항상 반전의 반전을 보여 주었던 이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으나 혹시 아나, 또 다른 반전의 모습으로 등장하 게 될지...
L은 중3 때 취미로 노래를 배우러 온 친구였다.
노래를 제법 성숙하게, 무엇보다 나이에 맞지 않게 본인 특유의 음색을 갖고 있었다.
피아노도 제법 칠 줄 알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전공을 희망하게 된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음악이란 걸 하고 싶지만 어느 것을 파고들고 싶어 하는지를 몰랐다.
노래도 좋고, 피아노도 좋고, 기타도 배우고 싶고...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작곡'이었다.
악기는 피아노를 더 탄탄하게 익히고 잠시 기타로 전향을 했다.
음악적 감각이 좋은 이 아이는 기타도 금방 금방 시키는 데로 곧 잘하였다.
피아노,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모습은 누가 봐도 가까운 미래에, 제법 괜찮은 싱어송라이터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러나 워낙 틀에 얽메이길 싫어하는 성격이다 보니 학원 커리큘럼을 제대로 따라가는 데에 어려움을 종종 겪곤 했다.
이론 수업은 아예 뒷 전이었고, 게다가 본인은 대학 진학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누누이 말하고 다녔다. 얼핏 다른 입시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도 했지만 본인이 좋아하는 건 워낙 열심히 했기에 오히려 다른 친구들에게 좋은 자극이 되곤 했다.
학원에서도 '연예인'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던 이 친구는 제법 알려져 있는 프로듀서, 뮤지션들과 여러 작업도 하는 모습을 보이고 한 때 소셜미디어에서도 활발했으나 요 근래에는 도통 소식이 뜸하다.
어느덧 서른을 넘긴 이 끼 많은 친구는 뭘 하며 지내고 있을까?
2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