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좋긴 하지만...

by 이삼오

(통화 중)


"아, 네. 이메일로 보내 주신 거 봤어요. 흠, 언제까지 필요하신데요? 다음 주 까지요? 네, 가능합니다. 그전에 1차 작업본 보내드려 볼게요."



음악 작업 관련 의뢰인가?



아니다. 서류 번역 관련 업무다. 주로 음악을 가르치지만 대외적으로 번역, 통역, 영어 과외 알바도 종종 문의가 들어온다. 실제로 음악 관련 일 보다는 영어 계통에서 뭔가 더 활발하다. 영어 강사로도 몇 년 지냈기에 아직도 간혹 알음알음 찾아주는 분이 계신 거였다.



내가 더 잘하는 건 무엇일까, 나를 더 필요로 하는 곳은 어디일까 라는 고민을 종종 하곤 했다. 이런 걸 봐서는 음악 쪽보다는 영어에서 더 두각을 나타나는 게 아닐까? 물론 수요 측면에서는 영어가 더 다채롭긴 하다. 게다가 음악 쪽은 내가 딱히 활동을 하거나 정치(?)를 하지 않았으니... 아쉬울 거 없는 쪽에서는 굳이 나를 찾을 이유가 없다. 간혹 동기들이 작업하는 거에 참여한다던지, 행사 가끔 뛰는 게 전부였다.



나만의 공간, 나의 음악적 나래를 펼치는 곳은 학원 내에 있는 서 너 평 남짓하는 내 레슨실이다.



"선생님은 재주가 많으시네요. 레슨도 하시고 영어 통번역에... 진정한 멀티시네요."



좋게 말하면 기타도 잘 치고, 영어도 잘하고(이거야 뭐, 당연한 거지만)...



무한 부정, 삐딱하게 보자면 뭐 하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는, 이도저도 아닌 '나'란 존재이다.



나이는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데 앞으로 나아가는 발전 없이 침체되어 있는 느낌을 시간이 갈수록 세게 와닿기 시작했다.



다들 어렸을 때, 젊었을 때 힘들게 가방 끈 더 늘리고 스펙 같은 거 쌓고, 자기계발에 열심일 때 나는 이미 자리 잡은 사회인인 마냥 안주하고 있다가 매너리즘이라는 늪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야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지만, 이유랑 사연은 누구나 다 있다.



이런 생각이 깊게 자리할수록 무엇을 하든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선생님, 지난번에 주신다고 했던 악보..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아, 미안. 깜빡했다. 지금 가서 뽑아올게."



"선생님, 죄송한데 이 거 지난주에 했던 내용과 같은데요?"



"아... 맞네. 이게 아닌고 이건 데... 미안."



"선생님, 제 MR은 이게 아닌데요? 잘못 주신 거 같은데..."



"아, 맞다. 이건 00이 MR인데 착각했다. 미안."



수업 때마다 조금씩 무언가를 놓치고, 깜빡하고, 내가 생각해도 소홀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학생들은 이상하다는 눈치를 가끔 줬고 오래간 봐왔 던 학생들은 내게 넌지시 물어본다.



"선생님,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이 정도 까지면 내가 분명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열정이 식은 것일 까? 내가 나 하나 제대로 건사 못 하는데 입시라는 큰 시험을 앞둔 학생들을 이끌 수 있을까? 이 들은 내가 아니라 빨리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나는 나에게 온 이 큰 슬럼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도 입시생처럼 제로에서 시작해 볼까?



그냥 음악 관련은 다 접고 기술을 배워 회사에 취직할까?



캐나다로 다시 돌아갈까?



밴드를 결성해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부딪혀 볼까?



아니면... 영어를 가르치면서 음악에서도 종종 기회를 엳볼까?



실제로 학력이나 스펙은 크게 신경 안 쓴다는 회사 몇 군데에 자소서와 이력서도 내 보고는 했다.



왠지 이 학원에서 영영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순진했던 건지, 당연히 아무 데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력서에 그나마 알아줄 만한 것은 능통한 영어 실력과 해외 대학 생활 이력이 전부였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크게 경쟁력 없는 나였다.





나는 음악에 대한 열정이 식은 지는 이미 오래 전인 것은 분명하고, 그럼 다시 진지하게 고민해 볼 때다.



이 학원에서 더 이상 정을 붙이기 힘든 건지 아니면 음악 강사라는 직업에 싫증이 난 거였는지, 아니면 그냥 내 앞에 닥친 어려움과 슬럼프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건지...



토론토에서 보스턴으로 떠났듯이,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떠나왔듯이, 난 그렇게 또 어디론가 떠나면 내 앞에 놓여있는 문제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레슨실 선반 위에 놓여있는 내 명함 케이스가 보인다. 집에 들고 가 쓰레기 통에 버렸다.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혹시 너 예전에 말했던 영어학원... 거기 아직 자리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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