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저 새끼 잡아! 고꾸라 지겠어."
경준이가 프랜시스에게 외쳤다.
다리에 힘이 풀려 버렸다. 아니, 갑자기 천장이 무너져 내려와 내 몸을 눌러 다리를 풀리게 했다.
작업실(당구장) 지하 계단에서 올라가던 중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프랜시스가 내 팔을 잡자마자 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이 핑핑 돌았다. 지하 계단 위에 있는 낡은 전구의 조명이 핑핑 돌았다. 레이저쇼를 연상케 했다.
"야, 정신 차려봐! 너 아까부터 말도 없고 넋 나간 인간처럼 보이더구먼 왜 그러는 건데?"
경준이가 나를 잡고 흔들며 계속 말을 걸었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프랜시스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끄러미 보더니 한마디 했다.
"이 자식 이거... 좀 수상해. 야, 주머니 뒤져봐."
저항하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아니,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고 팔다리도 움직일 수 없었다. 온몸에 마비가 온 것만 같았다. 숨은 쉬어졌다. 지하 계단에 습하고 찬 공기가 내 몸 안에 그대로 느껴졌다.
"어? 이게 뭐야? 약 통 같은데. 수면제...?"
경준이가 수면제 통을 열어 내용물을 봤다.
"야, 두 알 밖에 없는데? 몇 알을 처먹은 거야?"
"근데 이거 뭐지? 일반적인 수면제는 아닌 거 같은데..."
과학(특히 화학)을 좋아하는 놈 다운 분석이었다.
경준이와 프랜시스가 계속 뭐라고 한다. 도통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이 둘은 우선 나를 계단 위로,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서 한 편에 앉혔다.
1월 초, 젖은 눈이 한참 오고 있었다. 이런 날은 그리 춥지 않다. 난 더더욱 아무 추위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아무것도 느끼질 못했다.
차들이 지나가는 게 보였다. 대로변이라서 원래라면 엄청 시끄럽지만 모든 게 희미하게 들렸다. 눈을 몇 번 깜빡였는데 화려한 색의 조명이 보였다.
경찰차와 구급차였다. 경준이랑 프랜시스가 불렀나 보다. 아까 계단에서 둘이 계속 뭐라 뭐라 하던 게 이 거 때문이었나 보다.
경찰관 둘이 먼저 나를 잡고 얼굴에 손전등을 비췄다. 이 정도 불 빛이면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못 뜨겠지만 나는 마치 20년 차 베테랑 연극배우가 된 것 마냥 환한 스포트라이트에도 내 눈은 일절 반응을 안 했다.
눈을 몇 번 깜빡인 거 같은데, 난 어디엔가 누워있었다. 구급차 안 이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일 때마다 눈앞에 장면이 바뀌었다.
또 눈을 감았다. 뭔가 덜컹거리면서 끽끽 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을 뜨지는 않았다. 눈을 뜨면 다른 장면으로 바뀌어 있을 텐데, 궁금하지도, 또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 말 들리니? 들리면 아무 반응이나 좀 해볼래?"
나한테 하는 소린가? 살며시 눈을 떴다. 그다지 밝지 않은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이 하늘색 커튼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내 손 등에는 링거 바늘이 꽂혀있었다.
병원, 응급실인 것 같았다.
의사인지, 간호사인지 내게 계속 말을 걸었다. 소리는 선명하게 들렸다. 눈을 껌뻑일 수는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눈만 계속 깜빡일 뿐...
"여기가 어딘지 아니? 왜 온 건지 아니?"
어딘지도 알겠고 왜 온 건지도 알겠다. 다만, 답을 못 할 뿐이라고...
눈을 다시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 까, 주변이 웅성웅성했다. 나에게 뭐라고 하는 거 같았다.
내 몸을 요리조리 움직이는 거 같았다. 내 얼굴, 턱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입 안으로 뭔가 쑤셔 넣었다. 갑자기 뭔가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아프진 않지? 조금만 참으면 돼. 긴장 풀려고 해 봐."
내 몸속, 배 안에 있는 것들이 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 안에 있는 장기들을 밖으로 빼내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헛구역질이 계속 나왔다. 조금씩 몸에 마비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통스러운 게 지나가고 다시 평온해진 느낌이었다. 질끈 감고 있는 눈을 떴다. 정신은 여전히 몽롱했지만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머리가 욱신거리기 시작했고 커다란 쇳덩어리 하나를 올려놓은 듯했다.
"정신이 드니? 앉을 수 있겠어?"
간호사가 계속 말을 거는데 알아듣기 힘들었다. 아직 정신이 완전치 못한 것 같았다. 그래도 몸을 조금씩 움직일 수 있었다.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무언가가 머리를 계속 짓누르는 듯했다. 어지러웠지만 속이 메스껍지는 않았다. 링거의 힘인가 보다.
"이 것 좀 마셔. 이 거 한 통 다 마셔야 해. 혹시 토하거나 하면 또 마셔야 하니까 최대한 참아보려고 해 봐."
"이 게... 뭔가요?"
"숯이야."
"네? 숯검댕이 물을 마시라고요?"
"위가 많이 상했을 테니... 보호 역할이니까 마셔야 해."
한 모금 들이켰다. 컥.... 삼키질 못 하겠다. 숯 가루 같은 것들이 목에 탁 걸려서 도저히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든 꾸역꾸역 쑤셔 넣듯이, 혀를 최대한 이용하여 어떻게든 삼켰다. 아까 내 입, 몸속에 이상한 호스 같은 걸 넣었다면, 이제는 셀프 고문이었다. 다행인 건 콜라 500밀리 정도의 용량이라 감당이 되는 양이었다.
"그래도 잘 마셨네? 혹시 메스껍거나 그러니?"
"아니요. 괜찮은 거 같아요. 그런데... 여기 어디 병원이죠?"
"노스욕 제네럴이야." (North York General Hospital)
아, 예전에 몸에 몹쓸 두드러기가 나서 와봤던 곳이다. 게다가 이 병원은 프랜시스의 어머니가 간호사로 근무하고 계셨다.
정신이 점점 돌아오는 것 같았다.
"지금, 몇 시죠?"
"이제... 새벽 1시네."
'경준이와 프랜시스와 작업실(당구장)에 갔던 게 저녁 7시쯤, 한 시간 정도 있었나? 시간이 많이 지났네...'
"저... 친구들은 어디 있죠?"
"여기 온 지 한 시간 정도 있다 갔어. 계속 있으려고 했는데... 어차피 도움 될 게 없어서. 몇 가지 질문하고 보냈다."
간호사는 나에게 계속 말을 걸어왔다. 내 정신을 들게 하려고 그런 건지, 그냥 심심해서 말을 거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어리고 건강해서 그런지 회복력이 엄청 빠르네. 그 약을 그 정도 먹었으면 지금도 혼수상태여야 하는데. 그런데... 그 약은 처방받아야 하는데... 약 통을 보아하니 네 이름도 아니고... 어디서 났니?"
"......."
"솔직하게 얘기해줘야 해. 그래야 어떻게든 도움을 줄 수 있단다."
"무슨 도움을 말하는 거죠?"
"그 약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먹지는 않았을 텐데."
"얼마 전에 친구네 집에 갔는데... 친구 어머니가 수면제를 복용하시는 걸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거를..."
"그래서 그거를 들고 왔다는 거네."
"그렇죠..."
"그래서, 그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