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아, 남친 사귀고 싶다.”
“그러니까…….”
해미는 시계를 힐끗 봤다. ‘남친’이라는 말에 귀가 반응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러지 않은 척, 옆에서 대화하는 아이들을 보지 않고 시계에서 문제로 바로 고개를 돌렸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흔한 이야깃거리가 바로 연애니까. 하지만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얘기가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하아.
해미는 연필을 내려놨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을까. 본인은 그런 기분이 아니지만 아이들은 기뻐서 방방 뛰고 있었다. 오늘이 수영장을 공식적으로 오픈(?)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수영부 첫 훈련 날.
해미는 지금 쉬어야 할 것 같았다. 마음을 좀 진정해야 했다. 어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한 거에 모자라 오늘 수영장에 가서도 감정을 폭발시키면 안 된다. 다행히 들뜬 아이들은 해미가 대화에 끼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근데 우리 학교에는 잘생긴 애가 없는데…….”
“…….”
말하던 아이가 뜸을 들였다.
“뭐야, 있어? 아니, 좋아하는 애 있어?”
“…….”
해미는 벌써 2번째로 묵묵부답인 아이에게 눈을 맞췄다. 대화에 끼어들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의 대화를 듣는 것만으로도 괜찮았다. 대화에 끼어들어 뭔가를 말하면 이렇게 누군가를 ‘좋아한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군지는 알려줄 수 없어.”
‘뭐야, 있다고? 벌써? 이 나이에?’
아이의 말에 해미의 머리에서 질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긴 이미 학교에는 공식 커플 말고도 여러 비밀커플이 조용히 존재하고 있을 것일 터였다.
그때 해미의 시야에 자유로운 영혼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 자유로운 영혼은 어찌나 자유로운지 남자아이들과 딱밤 내기를 하고 있었다. 보고 있던 해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도 많이 봐서 이제는 익숙해진 장면이었지만. 지아에게 말하기 전 해미는 웃음을 가장했다.
“어, 지아야! 거기서 뭐 해?”
“해미야, 잠깐…….”
“이~야!”
“야아! 내가 이겼잖아, 왜 네가…….”
“메롱.”
지아의 목소리는 지아에게 딱밤을 때리는 현준의 목소리에 묻혀버렸다. 곧 지아는 남자애 속에서 하나가 되어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아! 야, 아프잖아! 너 맞을래…?”
“아니, 아 오지 마.”
“야, 나랑 해. 최현준, 나랑 딱밤 내기해.”
“아, 좀 가봐. 나 지금 얘……. 어, 그러니까…….”
“너, 내 성 까먹었지?”
꽤 종종 들리는 지아와 현준을 포함한 남자애들의 얘기. 문득 지아와 현준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해미는 떠오른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불쌍한 최현준. 지금쯤 지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생각에 푹 빠져 허우적댈 텐데.
‘남친? 남자친구 얘기한 거지?’
‘응. 애들이 그런 얘기 너한테도 하지 않아?’
‘아, 그거? 하지.’
‘……?’
‘…아, 그래서 어떠냐고?’
‘응.’
‘뭐가 어때, 어떻긴. 네 말은 남친 사귀고 싶냐는 거 아냐?’
그때 해미가 지아를 궁금한 눈빛이 아닌 뭔가를 바라는 눈빛으로 봤으면 답이 달라졌을까…? 해미는 종종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글쎄, 하는 고민을 지아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냥 단숨에 말했으니까. 원래부터 정해진 답을 한 게 아닐까.
‘뭘 남친을 사귀어? 지금 날 봐. 남자애와 담쌓고 지내? ‘여기 선 넘어오면 죽인다.’ 막 이러고? 아니잖아. 그럼 그냥 거기서 더 얘기해서 더 친해지고, 그럼 되지. 그게 남친이지. 남자친구. 남자, 걔 남자잖아. 그리고 친구, 친구처럼 지내니까.‘
지아의 말을 듣던 해미는 입을 삐죽였다.
‘그건 남사친이지.’
‘그리고 남자친구 사귀면 뭐 투투데이, 생일, 크리스마스, 100일, 200일……. 어떻게 챙기냐, 그거? 그러니까 그냥 남자애들이랑 친구처럼 지내, 남친 갖고 싶으면. 그리고 솔직히 나, 나랑 제일 친한 친구 생일 선물 3개 챙기는 것도 스트레스인데 걔까지 하면 1년에 선물을……. 적어도 한 10개는 챙겨야 하는 거 아냐, 가족 생일선물도 포함하면. 으…… 진짜 싫어.’
“으! 야, 내가 그건 절대로 가져가지 말라고 했지!”
“아, 나 죽었다. 선우야, 나 살려주라……!”
“얘 여기 있다, 때려라!”
“왜 날 갖다 팔아?”
“안 그러면 내가 한지아한테 맞으니까?”
“아, 맞네. 근데 한지아, 내가 한 거 아니라…….”
“야…! 너, 최현준!!!”
잠깐 한눈판 사이에 지아와 나머지 남자애들은 해미의 책상을 두고 난리를 피워놓았다. 아까는 딱밤 가지고 잘 노느니 싶었지만 최현준이 가져간 지아의 필통 때문에 화기애애한 딱밤 놀이는 이제 끝났다.
“최현준, 좋게 말할 때 지아 필통……! 아…!”
해미의 말은 해미가 책상 위에 올려놓은 팔 사이에 들어온 필통으로 끝이 났다. 해미는 놀라고 잠깐 아픈 것도 잠시, 던진 범인이 누군지 알기 위해 고개를 홱 돌렸다. 이럴 때는 순간적인 자세를 포착해야 했다.
“어, 해미야. 그거 내가 던진 거야, 나 줘.”
목소리의 범인은 지아였다. 현준이 해미를 다정하게 ‘해미야’하고 부를 리는 없을 테니까.
“아……? 지아야……?”
하고 해미가 삐걱거리고 있을 때 지아가 한숨을 쉬며 해미의 양팔 사이에 있는 필통을 가져갔다.
“아, 최현준에게 뺏기면 안 된다고……!”
해미도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넘기자. 조금 속상했지만 뭐… 지아가 워낙 쿨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