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들/『일상의 블랙홀』 1화
나는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편입니다.
나에게는 최애도 없고, 덕질도 없고, 수집품도 없고, 입소문 난 음식점을 찾아가 줄 서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일상의 블랙홀'이라는 시리즈를 쓰려는 걸까요?
우리는 매일을 살아가면서, 아무 일도 없는 하루 속에서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그건 누군가의 말 한 마디일 수도 있고, 지나치는 사람의 발걸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연재는 그런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들을 유머와 사유로 엮어보는 이야기입니다.
작은 블랙홀에 빠져본 당신의 이야기, 함께 나눠볼까요?
나는 자전거를 탄다. 봄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20분의 아침 출근길.
자동차 매연과 소음 대신 두 바퀴로 도시를 가로지르는 작은 자유.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고, 무엇보다 고가도로 옆 보도길을 오를 땐 내 허벅지가 잠깐 긴급 회의를 소집한다. "정말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오늘만큼은 그냥 버스 타자..." 뭐 그런 느낌.
하지만 시간 내서 운동도 하는데 참을 만하다. 단 한 가지를 빼고는.
좁은 보도 위, 나는 가고 그들은 온다. 자전거를 탄 나는 늘 상대방을 살핀다. "오른쪽으로 비킬까? 아니면 내가 먼저?" 눈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20년 전만 해도 서로 짧게라도 눈을 맞췄다. 살짝 미소 지으며 '먼저 가세요' 또는 '저 갈게요' 같은 암묵의 신호를 주고받았다.
지금은 다르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다. 눈은 스마트폰을 향하고, 입은 무선 이어폰 너머 다른 세계와 통한다. 나는 그저 풍경이다. 그들의 배경음.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엑스트라 같은 존재.
얼마 전, 회사 근처 보도에서 내가 마주친 한 여성. 그녀는 한 손에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른 손에는 스마트폰을 든 채 직진한다. 나는 벨을 살짝 울린다. 반응이 없다. 다시 한 번, 좀 더 긴 벨소리. 여전히 반응이 없다. 결국 나는 그녀 앞에서 자전거를 세우고, 그제서야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든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이.
또 다른 날엔, 내 앞을 등지고 가는 한 사람. 나는 그를 따라붙으며, 잠시 '예지자'가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은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옮길까?" 왼쪽일까, 오른쪽일까.
내 앞에 사람 둘이 서서 얘길 나누고 있으니 분명 왼쪽으로 가리라. 몸도 왼쪽으로 향하는 듯해 오른쪽으로 핸들을 튼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상대방이 급! 오른쪽으로 방향 전환. 나는 깜짝 놀라 급브레이크를 잡는다. 뒷바퀴가 들리는 기분이 든다.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고 그 사람을 향해 약간 비난하는 듯한 눈길을 준다. 그와 눈이 마주친다.
그는 이유를 모르는 표정으로 갈 길을 갈 뿐이다. 그의 귓속에선 아마도 좋아하는 음악이, 눈앞에선 카톡 메시지만이 그의 현재다.
나는 혼자 씩씩댄다. "아이 참..." 나만의 작은 정의감에 불타 속으로 몇번 욕해주고 다시 페달을 밟는다.
가끔은 상상한다. 좀 더 목소리를 높여 소리칠까? "잠시만요, 지나갈게요~" 아니면 그냥 한번 부딪혀버릴까?
길을 다 막고 일직선으로 걷는 청소년 무리.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멀찌감치 속도를 줄인다.
그냥... 무섭다.
어제도, 그제도 똑같은 반복이다..
요즘 나는 깨달았다. 현대인들은 몰입감이 좋다.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 몰입해 있다. 자전거 출근길이란, 누가 나를 '실재하는 존재'로 인식해주느냐를 놓고 벌이는 매일매일의 작은 실험이다.
그리고 통계는 말해준다. 오늘도, 내가 먼저 비켰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내일도 똑 같은 식으로 자전거를 탈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며 서로 미소 짓는 그 작은 기적을 기다릴 것이다. 서로 비켜주려는 선한 의지로 만들어지는 약간의 댄스와 수줍은 눈웃음으로 이어지는 소소한 행복감.
아, 오늘도 나의 자전거 출근길 생존게임은 계속된다.
당신의 출근길엔, 아직 눈맞춤이 남아있나요?
『일상의 블랙홀』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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