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일기 -릴케의 <가을날>의 감흥을 담아

혼자 읖조린 시 [8]

by 글빛누리

가을날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충분히도 길었습니다.
당신의 그늘을 해시계 위에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이 불도록 놓아주십시오.

마지막 과일들에게 명하소서 무르익게 하시고,
그들에게 남쪽 햇살 닮은 이틀을 더 주어
완성의 순간을 향해 밀어붙이시며
포도 속에 마지막 단맛까지 스며들게 하소서.

이제 집이 없는 자는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외로운 자는 오랫동안 외로움을 지닐 것입니다.
밤을 지새우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가을 잎이 흩날리는 가로수길을
불안한 걸음으로 오가게 될 것입니다.


아래의 시는 릴케의 〈가을날〉을 읽고 난 뒤,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계절의 감정이 다시 깨어나 쓰게 된 겨울의 기록이다. 릴케가 남긴 고요한 울림은, 가을의 완성과 풍요 뒤에 놓여 있는 공허와 멈춤의 세계를 조심스레 비춰주었다. 그 잔향 속에서 나는 자연스레 ‘겨울’이라는 이름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게 되었다.

가을은 마지막 햇빛을 붙들며 조금 더 머물러도 좋을 계절이지만, 겨울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빠르게 지나가기를 바라는 차가운 시간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생의 무게가 한층 더 무겁게 내려앉는 계절이다. 따뜻한 창가에서는 함박눈을 기다리는 설렘이 피어나지만, 그와 동시에 지하차도에서는 한 장의 슬리핑백으로 버텨야 하는 밤들이 있다.

나는 이 대비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겨울은 언제나 두 가지 표정을 함께 품고 있었다. 축복과 생존, 따뜻함과 고독, 눈의 빛과 바람의 그림자. 그 사이를 건너는 인간의 마음은 늘 복잡하고, 때로는 조용히 움츠러들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글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계절 앞에서 스스로에게 건네는 작은 속삭임에 가깝다. 겨울이 요구하는 멈춤과 견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속에서 미세하게 흔들리는 온기를 찾아내려는 마음의 기록이다.

릴케가 가을의 문을 닫았다면, 나는 그 뒤를 이어 겨울의 문턱에 잠시 서서 계절의 숨결을 적어보았다. 이 글이 누군가에게도 조용한 여백이 되어, 자신의 겨울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겨울일기 -글빛누리

가을은 풍요와 완성의 몫을 챙기며 조용히 뒤돌아섰다.
남은 햇빛을 조금만 더 달라며 신에게 속삭일 수 있던 계절은 떠나고,
겨울은 망설임 없이 문턱을 넘어 들어왔다.


겨울이 오면 더 이상 집을 지을 수 없다.
추위 속에서 외로운 사람은 더 외로워지고,
말 한 마디의 온기조차 쉽게 식어버린다.
이미 충분히 차가워진 밤의 온도를
되돌려 달라고 애원해도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많은 이들에게 겨울은
빠르게 지나가주기만을 바라는 계절이다.
춥다는 말로 채워지는 하루들,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는 다짐 같은 것들.

겨울이 가장 잔인한 건
가난한 사람들에게이다.
한 겹의 바람막이는 생명의 무게를 견디기엔 얇고,
따뜻한 잠자리 하나가
내일과 오늘을 가르는 선이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딘가에서는
겨울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크리스마스 이브,
조용히 내리는 함박눈 아래에서
한 가정은 촛불 같은 평온을 발견하고,
애완견은 눈밭 위에 작은 발자국을 남긴다.
다음 날 아침,
눈이 소복하게 쌓인 길을 걷는 순간은
빙수처럼 달콤하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겨울의 본모습은
언제나 멈춤과 고요에 가깝다.
가로수는 잎을 모두 잃고,
낙엽도 흔적 없이 치워진 거리엔
귀를 에는 바람만이 자국을 남긴다.
건물 사이에서 몰아치는 바람은
잠시 머금은 눈물마저 스산하게 식혀 놓고,
역사로 이어지는 지하차도 입구에는
슬리핑백에 몸을 웅크린 누군가의 밤이
낮은 불빛 아래 길게 드리워져 있다.


겨울은 이렇게
각자에게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어떤 이에게는 축복이고,
어떤 이에게는 생존이며,
또 다른 이에게는
묵묵히 하루를 버텨낸 기록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계절을
일기처럼 천천히 적어 내려간다.
추위와 고요,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낸 작은 온기들까지.

겨울은 우리에게 말한다.
멈추라고, 견디라고,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미세한 숨결을
조용히 들여다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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