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기숙사 뒤뜰의 벤치에 둘은 다시 앉아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기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노래 있잖아요.
솔베이지 송."
"네."
"그 노래, 그냥 듣기엔…
사랑을 찬양하는 노래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버티는 사람의 노래더라고요."
소영은 작게 웃었다.
그 웃음엔 아주 오래 묵은 무게가 실려 있었다.
"맞아요.
버티는 사람의 노래.
기다리는 사람의 노래."
잠시 침묵.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저… 남편이 있어요. 아직은.”
기훈은 고개를 들었다.
"‘아직은’…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리네요."
소영은 시선을 멀리 두며 말을 이어갔다.
“독일 오기 전부터였어요.
남편이 강사 생활하면서… 독일에 있는 여자와…”
말끝이 흐려졌다.
기훈은 그녀의 말을 자르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10년 동안…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요.
아니, 기다리는 삶을 선택했어요.
아이들 앞에서는 항상 ‘슈퍼맨 아빠’ 얘기만 했고,
명절엔 ‘바빠서 못 오신다’고 아이들에게 둘러댔죠.”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조금의 눈물도 없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누구보다도 부서져 있었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그랬다고요.
그게 그 사람의 변명이었어요.
독일에서 외롭다고, 그래서 사랑하게 됐다고.”
그리고 다시 조용히 말했다.
“그럼 나는…
나의 외로움은요?
10년을, 그 길고 쓸쓸한 계절을,
아무도 안아주지 않는 시간을,
아이들이 커서 등을 돌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작아졌는지, 그건…
나는, 누구한테서 위로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기훈은 입을 열 수 없었다.
소영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을, 이제야 처음 하고 있었다. 이곳 하이델베르크에서.
이 낯선 도시에서만 가능해진 고백이었다.
“지금도, 주말마다 데리러 와요.
남편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여기까지.”
“자주요?”
“이젠 아니에요.
간격이 점점… 길어지고 있어요.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시간도 줄었고요.”
“이혼 얘기를 해요?”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더 구체적으로요.
서류 얘기도 하고, 아이들 얘기도 정리하려 하고...
처음엔 그냥 그러려니 생각했어요.
근데… 이제는..."
그녀는 잠시 말을 끊었다.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여기, 하이델베르크는요…
어쩌면 제 해방구 같아요.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
그런데 지금 기훈씨엑게 내 얘기를 하고 있네요.”
그녀는 잠시 기훈을 바라보며 어이없이 웃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말들 사이엔, 한 사람이 스스로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싸안기 시작하는 순간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기훈은 문득 자신의 삶도 소영에게 조금씩 내어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죽음』은 이제 네번째 단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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