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소영과 기훈은 늦은 오후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날 무대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아이들 재우고, 저녁밥 치우고 나면…
바닷가를 걸었어요. 아이 하나는 등에 업고, 하나는 옆에서 졸면서 걷고.
그때 이 노래를 불렀죠. 바다 소리랑 섞이게.”
“어촌이었어요?”
“네. 완도 근처에 있는 아주 작은 마을.
남편은 그때 독일에 있었어요.
공부한다고 떠나고,
전 거기 남아서 아이 둘 키우고, 바다랑 버텼죠.”
기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도 감정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한 줄기 이야기처럼, 파도소리처럼 흘려보냈다.
“가끔 글도 썼어요. 틈틈이.
소설이랄 것까진 아니지만… 그냥 써두곤 했어요.
누가 보라고 쓴 건 아니었죠. 출품도 한 번도 안 했고.”
“왜요?”
“읽히면… 내가 무너질까 봐.”
그 대답에 기훈은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반장이면서, 아이를 키운 어머니이면서, 또한 그 모든 삶을 안고 살아남은 ‘여자’로서의 어떤 잔향.
시간이 흘렀고, 소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더 꺼냈다. 남편의 박사학위, 고등학생이던 딸과 함께 독일로 온 날들, 그리고 군복무 때문에 함께 오지 못했던 아들.
그녀의 삶은 구체적이었고, 동시에 추상적이었다. 세부가 또렷한데, 감정은 흐릿했다. 말 그대로 삶을 견딘 자의 어조였다.
“그래서 지금은… 어떠세요?”
기훈이 물었다.
소영은 창밖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이렇게라도 말하고 나니까…
조금, 살아 있는 것 같아요.”
기훈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를 다시 ‘살아 있게’ 만든 말의 수신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 역시 이 대화들 속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 감정이 너무 완벽하게 느껴질 때, 기훈은 이상하게 두려워졌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소영이 말문을 열었다.
“내가 견딘 게 아니라…
그냥 버텼을 뿐일 수도 있겠구나, 하고.”
저녁 시간의 하이델베르크는 고요했다. 어학원 기숙사 근처 작은 언덕 위 벤치에 둘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도시의 불빛이 멀리 반짝이고, 밤공기에는 알싸한 포도 냄새가 스며들어 있었다.
“견딘 거나, 버틴 거나… 결국 살아남은 거잖아요.”
기훈의 말에 소영은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되물었다.
“근데 그게 살아있는 건가요?”
기훈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말이 없었지만, 그녀의 질문은 분명 그의 심장 어딘가를 건드렸다.
소영은 조용히 이야기했다.
바닷가 마을, 기약 없이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며 두 아이를 키우던 나날. 아이의 젖병을 삶고, 기저귀를 널며, 저녁이면 억지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불 꺼진 골목을 걸었다고.
“정말… 지독했어요.
고요한데, 그 고요가 사람을 갉아먹는 거예요.
바다도, 바람도, 아무 위로가 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기도했나요?”
“네.
처음엔 많이 했어요.
정말 누가 듣고 있는 줄 알고.”
“그리고 나중엔?”
“그냥 말만 했어요.
들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 안 하면 나도 사라질 것 같아서.”
기훈은 눈을 감았다. 그녀의 말은 마치, 과거의 자신이 혼잣말로 뱉었던 문장들이
어딘가에서 살아 있다가, 지금, 그녀의 입을 빌려 다시 돌아온 것처럼 들렸다.
“신은 죽었을까.”
기훈이 조용히 말했다.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신이 죽은 뒤 인간은 스스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죠.
근데, 그게 가능은 한 걸까요?”
소영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 말…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
“니체는 그렇게 말했어요.
신이 죽었으니,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고.
사르트르는… 신이 없으니 인간은 자유롭고,
그 자유가 곧 두려움이라고 했고요.”
“근데 기훈 씨,
신이 죽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그렇게 자유롭지도 않죠.
아이 둘 키우는 엄마에게,
자유 같은 말은 사치였어요.”
기훈은 웃지 않았다. 그 말에 담긴 진실이, 웃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죽음은 어때요?”
소영이 물었다.
“철학에선 죽음을 어떻게 다뤄요?”
기훈은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죽음은… ‘존재’가 끝나는 게 아니라,
‘의식’이 스스로를 의식할 수 없게 되는 상태죠.
누군가는 말했어요.
죽음은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게 하는 계기라고.
그 인식이 인간을 진짜로 살게 만든다고.”
소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게 만든다고요…
근데 가끔은요,
그 죽음이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삶이 꿈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밤이 깊어가고, 말들은 줄어들고, 침묵은 점점 더 길어졌지만 서로에게 단 한 번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기훈은 소영이 혼잣말처럼 흘리던 그 말들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그녀는 지독하게 외로운 시간을 살아냈고,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지금 이 순간에.
그리고 기훈은 깨닫기 시작했다. 그녀의 존재가 자신 안에서 “무엇인가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그 변화가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두려웠다.
『하이델베르크에서의 죽음』은 이제 세번째 단계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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