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머씨 윈터양 이야기
4화:동행자, 윈터 양

고요한 걷기에서 피어나는 관계와 회복의 서사

by 글빛누리

4화 -동행자, 윈터 양

겨울의 첫 입김이 마을을 감싸기 시작한 11월의 어느 오후였다. 하늘은 회색빛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고, 바람은 마지막 남은 낙엽들을 길바닥에 흩뿌리고 있었다. 소년은 두꺼운 스웨터 위에 재킷을 걸치고 좀머 씨의 걸음을 뒤따르고 있었다.

《좀머 씨 관찰일지》에는 이제 수십 페이지의 기록이 쌓여 있었다. 소년은 일기를 쓰듯 좀머 씨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그의 걸음 수, 쉬는 횟수, 시선의 방향, 때로는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는 순간까지. 그리고 오늘, 소년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다.

비둘기들이 모여 있는 광장을 지날 때였다. 좀머 씨는 평소와 같이 일정한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3초에 2걸음, 고개는 15도 정도 숙여져 있었고, 두 손은 코트 주머니 속에 깊숙이 넣어져 있었다. 평범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의 뒤에서 걷고 있었다.

소년은 눈을 깜빡였다. 처음에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좀머 씨는 늘 혼자였다.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자, 존재방식이었다. 하지만 분명 검은 코트를 입은 여성이 그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언제부터?'

소년은 잠시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좀머 씨보다 조금 작은 키에, 단정한 회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고 있었다. 그녀의 걸음은 부드러웠고, 좀머 씨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팔 하나 정도의 간격이 있었지만, 묘하게도 그 공간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채워진 듯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소년은 그들을 멀리서 따라갔다. 햇살이 잠시 구름 사이로 비쳐 들어오자, 여자의 실루엣이 좀더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녀는 40대 후반쯤으로 보였고, 차분한 걸음으로 좀머 씨와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둘 사이에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단지 걸음, 그것뿐이었다.


그날 밤, 소년은 《좀머 씨 관찰일지》에 새로운 항목을 기록했다.

11월 17일 - 좀머 씨에게 동행자가 생겼다. 검은 코트를 입은 여성. 그녀는 마치 오랫동안 그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함께 걷고 있었다. 둘 사이에 말은 없었지만, 묘한 조화가 느껴졌다. 그녀를 '윈터 양'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겨울처럼 조용하지만,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튿날, 소년은 일찍 학교를 마치자마자 좀머 씨의 경로로 달려갔다. 윈터 양이 어제와 같은 장소에서 다시 나타날지 궁금했다.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노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3시 29분, 좀머 씨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녀가 있었다.

"윈터 양..."

소년은 작게 속삭였다. 그녀는 어제와 같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오늘은 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평온했고, 걸음은 어제보다 조금 더 좀머 씨에게 가까웠다.

소년은 그들을 따라 걸었다. 한 블록, 두 블록, 그리고 세 블록. 두 사람은 종종걸음도 아니고 느린 걸음도 아닌, 묘하게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처음에는 좀머 씨의 걸음이 조금 더 빨랐고, 윈터 양은 그에 맞추려는 듯 간간이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점차 그들의 발걸음은 하나의 리듬을 찾아갔다.

소년은 마을 사람들에게 윈터 양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검은 코트를 입은 부인을 보셨나요? 좀머 씨와 함께 걷는 분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이는 "좀머 씨는 항상 혼자 걷는 사람인데?"라고 되물었다. 마치 그녀는 소년과 좀머 씨만이 볼 수 있는 존재인 것처럼.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서점 주인인 린츠 할머니가 소년에게 말했다.

"아, 그 여자분... 한 달 전쯤에 마을에 이사 왔어.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거야. 회색 머리에 항상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 말하는 거지?"

"네! 맞아요. 윈터 양이요."

"윈터 양?"

"제가 지어드린 이름이에요. 좀머씨랑 같이 걷고 있어서…..."

할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진짜 이름은 모르지만, 가끔 서점에 와. 항상 시집을 찾아. 말은 별로 없어. 하지만 눈빛이 따뜻해."

소년은 그 정보를 귀중한 보물처럼 간직했다. 윈터 양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녀에 대한 첫 번째 실마리였다.


일주일이 지나고, 소년은 놀라운 변화를 발견했다. 좀머 씨와 윈터 양의 걸음 사이에는 이제 일정한 간격이 유지되었다. 3초에 2걸음씩, 그들은 정확히 같은 리듬으로 걸었다. 마치 수십 년간 함께 걸어온 사람들처럼.

더 놀라운 것은 좀머 씨의 자세였다. 항상 땅만 바라보던 그의 시선이 이제는 가끔씩 옆을 향했다. 윈터 양을 확인하는 듯한, 혹은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의 어깨는 예전보다 조금 더 펴져 있었고, 걸음에는 미세한 탄력이 느껴졌다.


소년은 《좀머 씨 관찰일지》에 새로운 장을 시작했다. 《좀머 씨와 윈터 양의 동행》이라는 제목이었다.

11월 24일 - 오늘 윈터 양이 잠시 벤치에 앉아 쉬었다. 좀머 씨는 멈추지 않고 걸었다. 하지만 10걸음 정도 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그녀가 다시 일어나 걸음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은 좀머 씨가 누군가를 '기다린' 첫 순간이다.
11월 27일 - 비가 내렸다. 윈터 양은 검은 우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우산을 좀머 씨 쪽으로 기울여 들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녀는 계속 우산을 그쪽으로 기울였다. 결국 그들은 반쯤 젖은 채로 걸었다.
12월 1일 - 오늘 윈터 양이 작은 책을 들고 있었다. 시집인 것 같았다. 그녀는 가끔 무언가가 생각난 듯 걸음을 늦추곤 했다. 그럴 때마다 좀머 씨는 살짝 속도를 늦추었다. 그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12월의 첫 눈이 내리던 날, 소년은 창가에서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눈송이들이 거리를 덮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때 소년은 그들을 보았다. 좀머 씨와 윈터 양은 천천히 눈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의 발자국은 하얀 눈 위에 나란히 찍혀 있었다.

소년은 재빨리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눈은 점점 더 굵어졌고, 거리는 점점 더 하얗게 변해갔다. 그는 조금 멀리서 그들을 따라갔다. 윈터 양의 검은 코트 위로 눈송이들이 내려앉았고, 좀머 씨의 회색 모자도 곧 하얗게 변했다.

그때였다. 윈터 양이 갑자기 발을 헛디뎌 비틀거렸다. 눈길이 미끄러웠을 것이다. 그녀는 넘어지지 않으려 팔을 뻗었고… 좀머 씨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소년은 숨을 멈췄다. 좀머 씨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 것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것도 자연스럽게, 거의 반사적으로. 그들의 손과 팔이 만나는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윈터 양은 천천히 균형을 되찾았다. 좀머 씨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좀머 씨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년은 너무 멀리 있어 그 말을 들을 수 없었지만, 분명 좀머 씨가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윈터 양은 미소를 지었다. 작고 따뜻한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도 뭔가 대답했다. 짧은 대화였지만, 소년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좀머 씨가 천천히 그녀의 팔을 놓았다. 그러나 이제 그들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져 있었다. 팔 하나가 아닌, 어깨가 거의 맞닿을 듯한 거리였다.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좀머 씨의 걸음은 이전보다 더 조심스러워졌고, 윈터 양은 그의 옆에서 같은 속도로 발을 내디뎠다.


소년은 그 순간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다. 집에 돌아온 그는 떨리는 손으로 《좀머 씨 관찰일지》를 펼쳤다.

12월 5일 - 기적이 일어났다. 오늘 눈길에서 윈터 양이 미끄러졌을 때, 좀머 씨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말을 했다! 3년 동안 “제발 나를 내버려 두세요” 한 마디 외엔 하지 않던 좀머 씨가 윈터 양에게 말을 건넸다. 그의 목소리가 어땠을지 너무 궁금하다. 거칠었을까, 부드러웠을까? 오늘부터 좀머 씨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걸음에는 이제 다른 호흡이 스며들었다.


이튿날, 학교가 끝난 후 소년은 서둘러 그들의 경로로 향했다. 눈은 그쳤지만, 거리는 여전히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소년은 마음속으로 그들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했다. 어쩌면 팔짱을 끼고 있을지도, 아니면 대화를 나누며 걸을지도...

그때였다. 소년은 멀리서 그들을 발견했다. 좀머 씨와 윈터 양은 여전히 나란히 걷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가 달랐다. 좀머 씨는 걷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윈터 양도 함께 멈추었다. 그리고 좀머 씨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하늘 아래 그의 표정은 소년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평온함. 그것은 평온함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날 오후, 소년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그들이 공원을 지날 때였다. 좀머 씨가 걸음을 늦추더니, 벤치를 향해 걸었다. 윈터 양도 그를 따랐다. 그들은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팔 하나 정도의 간격을 두고, 하지만 분명히 '함께' 앉은 것이었다.

소년은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좀머 씨와 윈터 양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어떤 대화가 오가고 있는 듯했다. 소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사이의 공기가 진동하는 것처럼.

한참 후, 그들은 다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이제 그들의 걸음에는 새로운 리듬이 있었다. 혼자 걸을 때의 고독한 리듬도, 그렇다고 완전히 하나가 된 리듬도 아닌. 두 개의 다른 걸음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와 같은 것이었다.

소년은 그날의 관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좀머 씨가 혼자 걸을 때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걷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이제 윈터 양과 함께 걸을 때는, 그는 조금씩 현재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햇살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무렵, 소년은 창가에 앉아 《좀머 씨 관찰일지》에 그날의 마지막 기록을 남겼다.


12월 6일 - 오늘 좀머 씨와 윈터 양은 벤치에 함께 앉았다. 그들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었다. 좀머 씨의 얼굴에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의 걸음은 이제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도망치는 걸음이 아니다. 어쩌면... 어쩌면 그는 이제 무언가를 향해 걷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P.S. 윈터 양은 좀머 씨에게 어떤 사람일까? 그녀는 어디서 왔고, 왜 좀머 씨와 함께 걷기 시작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서로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언젠가 나는 그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들이 함께 걷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소년은 일기장을 덮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린 거리는 고요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기대감이 일었다. 내일은 또 어떤 변화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좀머 씨와 윈터 양의 걸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소년은 미소 지으며 눈을 감았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좀머 씨와 윈터 양》은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2편씩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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