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빛을..."

-사소하지만 나를 붙잡은 순간/ 『일상의 블랙홀』13화

by 글빛누리

한때는 붉은 얼굴로 세상을 향해 걸어가던 시절이 있었다.

손에는 무엇 하나 쥔 것도 없었지만, 마음속에는 내일이라는 불빛이 있었다.
그 불빛을 따라, 때로는 넘어진 무릎을 쓸어내리며, 때로는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달리며 살아왔다.

그러다 문득, 문득이라는 말도 사치처럼 느껴질 만큼 조용히, 나이가 든다.
창밖의 꽃은 여전히 피고 지는데
내 안의 계절은 어느덧 가을을 지나 겨울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젊은 날엔 몰랐다.
무엇이 그렇게 급했는지,
어디로 그렇게 바삐 걸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날이 결국 이렇게 허공에 흩날릴 줄도 몰랐다.

돌아보면,
참 많은 사람을 사랑했고,
또 많은 사람을 미워했으며,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제는 얼굴도 이름도 흐릿해진 그 사람들과의 기억들.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놓아버렸던 걸까.


거울 속 내 얼굴을 보면
낯선 사람이 나를 본다.
주름은 세월이 아니라, 내가 오래 참고 견뎌온 침묵들의 흔적이다.

나는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아무 기록에도 남지 않을 인생이지만,
내 안에는 내 생의 모든 사계가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사계는 여전히 나직하게 속삭인다.

“아쉬워해도 괜찮아.
그만큼 너는 살아 있었던 거니까.”


괴테는 임종의 순간에 말했다.

Mehr Licht.
— 좀 더 빛을.

살아 생전에 이미 모든 걸 이루었다고 여겨졌던 그가
죽음의 문턱에서 더 많은 빛을 원했다는 말은
단지 방 안을 밝히라는 뜻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끝내 닿지 못한 진리,
채 다 품지 못한 삶,
미처 다 쓰지 못한 문장,
그리고 여전히 어두운 인간의 내면..

살아 있음이란
언제나 빛을 향한 움직임이다.

우리는 끝없이 무언가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것이 청춘이고, 그리움이며,
또 회한이기도 하다.

주릅.png

올해 아흔넷의 어머니.
눈이 흐려지고, 몸이 어색해졌다.
현대적 기기도 낯설고, 모임도 멀다.
가끔은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이런 말을 하신다.
“나는 그냥… 여기 있는데, 사는 것 같지도 않아.”

세상은 빠르게 움직이고,
그 안에서 어머니는 점점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느낌을 받는다.
소설도 쓰고 책도 펴내고 사람들 사이에서 중심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과연 사람은 언제
자신을 ‘바깥의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는가?

그건 단지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삶과 삶을 연결해주는 끈이 느슨해질 때가 아닐까.
기억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고,
손을 잡아줄 이도 멀어질 때.


그 외곽에 놓인 마음을 다시 안으로 끌어오는 힘.
그것은 놀라운 말이 아니라,
오히려 아주 작고 느린 일상 속에 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더 많은 빛을 건넨다.
괴테가 마지막 순간에 그리워했던 그 빛처럼,
삶의 끝자락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어머니의 자리까지 다다랐을 때,
나도 이렇게 조용히 중얼거리게 될지 모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랑은 균형을 되찾는 용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