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근무하던 시절 S와 J 그리고 H는 나에게 좋은 인연으로 다가왔다. 서로를 의지하며 버텼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이었다. 업무에 지칠 때면 여행 한번 가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반복했었다. 메아리처럼 울리던 여행이라는 단어는 비행기, 제주도, 숙박이라는 단어들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근무 중 카톡이 울렸다. 무심코 들여다본 카톡 대화명은 고 제주였다. 고제주라는 이름은 내가 모르는 이름이었다. 간혹 모르는 사람에게 스팸 메시지가 오기도 하니 들어가 볼 이유가 나에게는 없었다. 이런 나의 엉뚱함을 보며 재밌어하던 J와 H, S에 의해 대화명 고제주의 정체를 알게 됐다.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들은 대화방 고 제주에서 확정 지었다.
고 제주!!
H(84년생/여), S(94년생/남), J(87년생/여), 나(74년생/여). 다소 어색할 법한 연령과 성별의 조합이었지만 우리는 개의치 않았다. 근무하는 동안 수집된 정보로 J의 부모님이 제주도에서 펜션을 하고 계시다는 걸 알았다. 여행지를 제주도로 결정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J의 부모님 펜션은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날씨마저 축복이었다. 허당끼 있는 나를 짐스러워하지 않는 그들에게 언제나 감사했다.
J가 제주도민은 아니지만 야무지게 우리를 가이드했다. 검색해서 찾아낸 식당 회국수는 국수라고 하기엔 호사스러울 정도로 회가 수북하게 올라가 있었다. 흑돼지고기는 입에 넣자마자 살살 녹아 없어지는 마법을 부렸다. 우도에서의 날씨는 바다색과 하늘색을 투명하게 비춰주어 눈의 피로를 씻어주었다. 용오름에 올랐던 날은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시간이 멈춘 듯했고 해지는 노을빛은 우주체험을 하는 것처럼 신비로웠다.
그렇게 우리 넷의 여행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첫날, 제주행 비행기 안에서 있었던 일을 빼고 말이다.
김포공항행 버스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 준비를 마쳤다. 남편이 시외버스터미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운전대를 잡고 나섰다. 사방이 안개로 뒤덮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하필 이런 날 안개가 이렇게 잔뜩 낄게 뭐람?”
나는 마음이 급해져서 불평 섞인 말을 했다. 그 순간 핸들을 고쳐 잡는 남편의 손이 보였다. 안전을 위해 그에게 말했다. “천천히 가도 돼.” 보조석에 앉은 나는 말과 달리 버스를 놓칠 것 같은 불안감에 허공에 대고 액셀을 밟고 또 밟았다.
무사히 시외버스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 탑승까지 시간은 여유로웠다. 김포공항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탑승 전 간단하게 커피 한잔씩 하기로 했다. 믹스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달달한 돌체라테를 주문했다. 설렘 한 스푼이 들어가서인지 그날의 돌체라테 맛은 최고였다.
마지막으로 H와 화장실에 다녀온 후 비행기 탑승을 위해 줄을 섰다. 기체 입구까지 가서는 H가 핸드폰을 화장실에 놓고 왔다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난 H의 짐을 받아 들고 아무렇지 않게 기내로 들어가 착석했다. H는 어디 있느냐는 J의 물음에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자리에 착석했다. 웃고 있는 J의 동공은 많이 흔들리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뛰어갔다 온 H는 자리에 앉아 연신 부채질을 했다. 사력을 다해 뛰었다는 H는 많이 지쳐 보였다. 휴대폰을 찾아서 다행이고 비행기에 탑승한 건 정말 더더더 다행이었다. 비행기가 이륙을 위해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배가 살짝 아파왔다. 나와 통로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는 J에게 말했다.
“화장실 가고 싶다. 비행기 뜨고 다녀와야겠어요.”
이륙 후 안정권에 들어 기장의 안내 멘트가 나올 때까지 자리에서 이탈할 수 없었기에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어라! 상황은 점점 급박해져 갔다. 뱃속이 아수라장이 되어 뭔가 폭발할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
맨 뒤쪽을 돌아보며 승무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승무원은 친절하게 수신호로 엑스(X) 표시를 보내주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심호흡을 하며 다시 참아보려 애썼다. 터져 나오려는 생리현상과 이성을 부여잡고 막아내려는 행위가 힘겨웠다. 식은땀이 온몸을 타고 흐르며 지옥 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곧 화산이 분출할 것 같았다. 제발... 제. 발.
J는 조금 전까지 별스럽지 않게 화장실 가고 싶다고 말했던 내가 순식간에 얕은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하는 모습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즈음 비행기는 완전히 이륙하여 상공을 날고 있었다. 다시 뒤를 돌아 승무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승무원은 단호하게 수신호(X!!)를 보냈다. 곧. 곧 이륙 후 안정권에 들었다는 기장의 안내 멘트가 나올 것이다. 아악! 1초가 1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나는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승무원에게 튀어 나갔다. 저절로 무릎이 굽혀졌고 “안.. 돼. 요. 진짜.. 안.. 돼요.”라고 고개 숙여 말했고 승무원도 나를 보며 “안 돼요. 안 돼요.”라고 외쳤다. 서로를 마주 보며 각자의 이유로 절규했다. 난 더 이상 승무원의 지시를 따를 수 없었다. 그야말로 일보직전!!
J는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안타까우면서도 나와 승무원의 모습이 웃기기도 해서 표정관리가 어려웠다고 한다.
나는 다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땀줄기와 긴 호흡이 같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이성을 되찾고 나니 화장실문 밖으로 나가는 게 부끄러웠다. 조용히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승무원들은 음료 및 물을 제공하고 다녔다. 좀 전에 나하고 대치했던 승무원이 물을 들고 내쪽으로 왔다. 방금 전 행동은 너무 위험한 행동이었고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고 주의를 주었다.
“죄송해요. 근데 아까처럼 참을 수 없이 급할 때는 어떡해요? 그냥 자기 자리에서 해결해요?””
“네.”
승무원의 대답은 간결했다.
가능? 흐어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