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의 목소리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어릴 때 나는 아빠의 부재로 인한 공허함, 상처로 남은 낙인, 부적격자 같은 존재감을 느끼며 살았다. 학창 시절에 나는 그저 그런 무채색 같은 아이였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아빠가 없는 것은 나를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는 만큼 나는 힘든 호흡을 하며 지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결혼 후 아이를 낳고부터 남편에게 우리 아이를 향한 완벽한 아빠역할을 기대했다. 무의식 속 나에게 아빠라는 타이틀에 대한 기대치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남편은 아빠 역할에 대한 계산된 공식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달랐다. 큰 울타리이길 원했다. 아빠라는 존재가 아이들에게 좀 더 따뜻하게 부각되고 존재하길 바랐다. 나에게 남편의 자연스러움은 적극성이 없어 보이고 늘 부족해 보였다. 나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아이에게 엄마, 아빠의 부재감을 느끼지 않게 하려 애썼다.
첫 아이가 5살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낯선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의 존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아빠(F)'라는 사람이었다. 나이 지긋한 톤에 조금은 힘겨워하는 말소리였다. 내 나이 서른 중반즈음 나의 달팽이관을 자극시킨 익숙지 않은 음성이었다.
F는 암투병 중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이 부산에서 아들, 딸과 살고 있다고 했다. 궁금하지 않았던 여러 정보를 들으며 그 어떤 감정도 일어나지 않았다. 놀랍지도, 안쓰럽지도, 반갑지도, 원망스럽지도, 설레지도 않는 것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리곤 얼마 뒤 F의 현 배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우리 자매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잘 커줘서 고맙다고, 자신도 F의 폭력성 때문에 힘들게 살았다고 했다. 아이들 때문에 버티고 살았다며 고해성사를 했다. F의 폭력은 습관인 듯했다. 나는 '고생했다. 힘들었겠다.'와 같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달리 뭐라 해줄 말이 없었다. 갑자기 왜? 이제 와서 어쩌라고?
그날 이후 F와의 전화통화는 몇 차례 더 이어졌다. F는 동생과 나를 한번 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살면서 F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이상한 건 분명 만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순순히 만남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심지어 F를 인천 우리 집까지 초대했다. 처음 마주한 날, F의 입에서 나온 말은 실망을 넘어 가관이었다.
"너네 왜 이렇게 못 컸니? 우리 애들은 전부 키가 큰데. 너네 엄마가 너 낳고 얼마나 좋아했는데, 네가 엄청 총명하고 끼가 많아서 엄마가 자랑스러워했는데 왜 대학도 못 갔니?"
학 씨! 사람은 너무 엉뚱하고 얼토당토않은 말을 들을 때 대꾸하기조차 싫어진다. 나는 남편만 들을 수 있게 퉁퉁 댔다. "내가 안 크고 싶어서 안 컸겠어? 그리고 대학은 안 가고 싶어서 안 갔나? 형편이 그랬던 거지!" 자신이 월남전 참전용사로 국가유공자라며 이제라도 대학을 가려거든 가라고 했다. 그간의 세월에 비해 대화 내용은 무지 쿨하고 가벼웠다. 그래서였을까. F의 투병 사실과 깡마른 행색도 그리 무겁게 다가오지 않았다.
암을 앓고 있던 F가 부산에서 인천을 당일로 왔다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기에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밥을 준비하는 나에게 F는 또 한 번 이해가지 않는 말을 한다. "난 아침 안 먹어. 네 엄마랑 살면서 아침에 더 자게 하려고 안 먹었던 게 지금껏 아침을 안 먹어." 하...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남편은 처음 대면하는 장인 아닌 장인어른에게 예의를 갖췄다. 남편은 자상하고 자연스러운 남자였다. 어떤 행동이던 인위적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사람. 그냥 그대로 자기 위치에서 할 일 하는 사람. 좋은 사람. 완벽하진 않아도 남편을 만난 뒤 분명히 내 안에 평화라는 것이 자리 잡은지도 모른다.
짧은 인연처럼 나의 심경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연락이 오면 받았고 이야기하면 들었다. F와의 연락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F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F의 목소리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의 얼굴을 바라본다. 울 엄마 아직 곱다.
남편의 얼굴을 본다. 여전히 평화롭다.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따뜻하고 따뜻하다.
사진출처 : pexels-nicollazzi-xi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