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하게 반짝이는 흰머리
언제부턴가 흰머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 머리 어딘가에서 당당하게 반짝이며 솟아 있어 남편 눈에 띄어 뽑혀나가기 일쑤였다. 이제는 머리카락 한 가닥도 소중해 뽑지 못하게 말려도 꼿꼿하게 서있는 흰머리는 이내 눈엣가시가 되어 뽑혀나간다. 나이가 들면 흰머리가 올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나는 이상하게도 흰머리에 관대했고 뿌리염색 주기를 놓쳐 방치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때마다 나를 보는 주변사람들이 염색 좀 하라고 재촉하곤 했다.
버티다 결국 염색을 위해 미용실 예약을 했다. 오랜만에 찾은 미용실에는 이미 머리를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염색만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자리에 앉자 욕심이 생겼다. 펌을 해도 괜찮을지 상담을 했다. 급하게 인터넷으로 원하는 스타일의 펌을 찾아 원장님에게 보여주었다. 충분히 가능한 스타일이라고 했다. 나는 뒤이은 저녁 약속까지 시간이 넉넉해 여유롭게 머리를 하고 이동할 예정이었다.
염색약을 바르고 기다리는 동안 못 보던 스태프 두 명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 다니던 미용실이라 처음 보는 남자와 여자 스태프는 금세 내 눈에 띄었다. 미용보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군기가 바짝 들어가 보였다. 손님한테나 원장님한테나 어려움이 잔뜩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고등학생처럼 보이기도 하는 외모의 남자 스태프는 내 머리를 만질 때도 예의 바르고 상냥하게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의 다소 서투른 친절함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여자스태프의 안내를 받아 샴푸대로 향했다. 작고 여린 손으로 구석구석 야무지게 샴푸를 해주는데 제법 전문가다웠다. 이제 펌을 하기 위해 남녀 스태프가 내 양옆에 서서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려주었다. 배움의 자세란 그런 걸까. 섬세한 손끝으로 아기 머리 다루듯 조심스럽게 내 머리카락을 만졌다. 친절함과 섬세한 스태프들의 서비스는 시술시간이 길어지는 마법을 부렸다.
남자 스태프는 깜빡하고 앞머리 중화하는 것을 빼먹었다. 머리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4시간이 넘어가자 점점 허리도 아프고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원장님이 남자 스태프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클리닉 서비스를 해주며 다시 앞머리 중화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내 몸은 비비 꼬이기 시작했다. 그 어떤 추가서비스도 마다할 정도로 충분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5시간 정도 소요된 덕분에 저녁약속까지의 시간은 빠듯해졌다. 남자 스태프는 자신의 실수에 대한 미안함으로 안절부절못했지만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듯 보였다. 원장님 또한 스태프가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했다.
미용실 풍경은 아직도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곳의 남녀 스태프도 헤어디자이너를 꿈꾸며 일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도제식 교육으로 보통 3년에서 4년간 스태프로 일한 뒤에 정식으로 헤어디자이너가 될 것이다. 서비스업의 특성으로 고객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어야 하고 위계가 철저해 많은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분야이다.
다시 샴푸대로 향할 때 젊은 남자 스태프의 시뻘건 손이 보였다.
“아이고, 손이 고생스럽네요.”
아들 같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다. 그렇다. 나는 그날 남녀 스태프에게서 아들, 딸을 보는 같은 마음이 들었다. 수줍게 웃는 남자 스태프의 모습.
원장님이 스태프의 실수로 시간이 연장된 것을 미안해할 때 난 남자 스태프를 지적하고 싶지 않았다.
“미용이 쉽지 않은 길이죠. 아직도 미용실 스태프의 환경은 많이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기술은 세월이 지나면 습득할 수 있는 건데 저분의 밝고 적극적인 인성은 쉽게 배워지지 않는 좋은 모습인 것 같아요. 원장님은 좋은 분 두셨네요. 요즘은 집집마다 자녀가 많지 않아서 모두 애지중지 귀하게 커요. 이렇게 힘든 일은 버티기 어렵죠.”
원장님 또한 격한 공감을 표현했다. 안 그래도 남자 스태프가 너무 힘들다며 그만둔다고 했었단다. 원장님은 남자스태프에게 잘 배워두면 너무도 좋은 기술이니 조금만 잘 버텨보라고 달랬다고 한다. 지금 스태프들은 버티고 있는 중일 것이다. 누군가의 응원과 다독임, 그리고 자신들의 미래 꿈을 향해. 머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나는 배달어플로 피자를 주문했다. 그곳의 스태프들, 우리들의 아들과 딸을 응원하기 위해, 오늘의 자세가 그리고 서비스가 고마웠다고 말이다.
사진출처 : pexels-kamp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