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는 한숨을 싣고
깜상, 까만 콩. 나를 표현하던 단어들이다.
어릴 때부터 까만 피부였던 나는 피부결에 대한 고민과 잡티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다행인 건지 피부트러블 없이 살았기에 피부관리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희고 고운 백색 피부가 되지 않는 이상 피부관리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피부상태와 상관없이 언제나 피부색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었다. 내 기준에 여자는 피부만 하얘도 그 자체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나이 40대에 접어들면서 깜장콩에도 잡티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깜장콩에 잡티라니.. 하얀 피부에 깨가 붙으면 발랄해 보이고 귀엽기까지 한데 까만 얼굴에 거뭇거뭇 점점이 들이 생기니 내 모습은 흡사 초코칩쿠키처럼 보였다.
난생처음 피부과에 가서 상담을 받았다. 레이저시술이라는 것을 추천받았다. 금액대가 저렴하다고 생각되진 않았지만 잡티가 사라진다면야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이름도 낯선 레이저시술을 받았다. 처음 받아보는 레이저시술은 샷을 조사할 때마다 후회가 밀려왔다. 얼굴은 계속 뜨겁고, 따갑고, 눈앞이 번쩍번쩍! 내가 왜 비싼 돈 내고 마치 적군에게 끌려가 고문을 받듯 움찔움찔거리고 있나 싶었다. 길지 않은 시술 시간 동안 주먹이 불끈불끈 쥐어지고 발가락은 움츠러들었다. 눈물이 또르르..
주의사항을 안내받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룸밀러에 비친 내 얼굴은 낮술을 거하게 마셨다고 해도 믿을 만큼 가관이었다. 다음날부터는 더 가관이었다. 내 얼굴에 앉아 있던 잡티들이 레이저의 공격을 받고 얼굴 곳곳에 검고 새까만 딱지로 둔갑해 있었다. 잡티 빼러 갔다가 그을린 잡티로 지저분하게 덕지덕지 깨박사가 되어 온 꼴이었다. 피부재생주기에 맞춰 몇 회의 레이저시술이 추가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 딱지는 떨어져 나가고 나의 낯빛은 까만 콩에서 누르스름한 콩 정도로 변하고 있었다. 대만족이었다. 그야말로 신세계! 처음은 낯설지만 적응 못할 것도 없었다.
고통도 적응이 되더이다. 가성비까지 따져가며 내게 맞는 피부과를 찾아다녔다. 어느덧 정기적으로 인천행 버스를 타고 피부과를 다니는 경지에 이르렀다. 좋은 것은 나누고 전파하게 된다. 엄마도 함께 다니자고 꼬드겼다. 그날도 아침부터 인천행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렀다. 피부를 핑계로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을 위해 부산스럽게 움직인다.
우리의 집요하고도 꾸준한 부산스러움은 처음 피부관리를 접했을 때만큼의 놀라운 변화를 안겨주지 못했다. 정체기 또는 후퇴기가 분명했다. 색소는 어느새 피부 겉면으로 올라와 광대 주변으로 촤 악- 흩뿌려진다. 앞치마에 남은 튀김기름자국처럼. 피부가 노화되는 속도를 어떻게든 늦춰보자며 기를 쓰지만 내가 들이는 노력은 그저 자기만족에 불과했다. 처음 피부관리에 발을 들일 때도 나는 자기 만족감으로 꾸준한 관리의 길을 선택했다. 만족한다!!
보통날은 출발 5분 전쯤 버스가 손님을 태우기 위해 승차홈에 정차해 있는다. 출발시간이 다되도록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차가 막히나?' 하고 생각하는 찰나에 버스가 승차홈으로 들어섰다. 버스 출입문이 열리자 승차홈 앞에서 손님들 표를 받아주는 아저씨가 기사 아저씨를 향해 냅다 소리 질렀다.
"시계부터 맞춰!! 지금이 몇 시야!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미리 와서 버스를 기다리던 사람들이 많이 모여 줄지어 있었다. 맨 앞에서 버스표를 찍기 위해 기다렸던 엄마와 나는 운전기사 아저씨의 모습을 그대로 직관했다. 나는 소리 지르는 아저씨와 버스기사아저씨 모습을 번갈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사람들 많은데, 그만하세요.' 마음의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아저씨는 당황하며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버스 내 시계를 다시 맞추는 것으로 보였다. 바로 출발해야 했던 버스는 기사아저씨의 한숨을 시작으로 무겁게 움직였다. 맨 앞자리에 앉아 가던 엄마와 나는 운전기사님의 한숨소리에 섞인 여러 가지 감정들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사아저씨가 운전하는 버스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한숨을 연료 삼아 운행될 것 같았다. 운전기사님의 한숨에 섞여 나온 감정들은 버스핸들에 실려 표현되고 있었다.
보통의 나는 피부가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 스르르 잠이 든다. 그날은 운전기사아저씨의 마음에 새살이 돋아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눈 부릅뜨고 버스 앞유리에 레이저를 쏘아 댔다.
아저씨도 내 피부도 조금 천천히 갑시다.
사진출처 : pexels-chermito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