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팔 벌려 자비로운 모습의 감나무
집 앞마당에는 감나무 두 그루가 있다. 단감나무와 대봉 감나무. 매년 때가 되면 빛깔 좋은 열매가 열린다. 그림의 떡은 우리 집에 있는 감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주황색 감이 먹음직스럽게 달려도 풍경으로 바라만 볼 뿐, 가족 중에 열매 수확에 대한 의지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아쉬움 따위 없이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하루는 이웃 할머니와 인사를 나눴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할머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과일이 감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이 말을 한 이유인즉슨, 감나무에 열린 감 안 딸 거면 할머니 아들시켜서 딸테니 나눠 먹자는 제안을 하기 위해서였다.
"할머니, 우리 집엔 저 감을 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매해 쳐다보기만 하는걸요. 그렇게 하세요."
할머니는 입맛을 다시곤 기대에 찬 발걸음으로 돌아섰다. 여러 해 동안 감이 열리면 열리나 보다, 떨어지면 떨어지나 보다 본 둥 만 둥 하고 지냈다. 그날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뒤로는 감나무에 계속 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곤 얼마 후 신기하게도 여동생에게서 손 닿는 곳에 있는 감을 따겠다고 연락이 왔다. 먼저 제안한 할머니가 있으니 기다려 보라고 했다.
"할머니, 감 안 따셔요?"
"가만있어봐. 이번 주에 서울서 아들이 와서 따준다고 했어."
며칠 뒤 감이 담긴 작은 자루가 집 앞에 놓여 있었다. '할머니 아들이 감을 땄구나.' 나의 시선은 감나무로 향했다. 감나무가 워낙 키 크게 자라 높은 가지에 달려 있는 감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서울 산다던 할머니 아들이 서울사람 다되어 감 따는 재주가 녹슨 게 분명했다. 어정쩡하게 남아 있는 감들이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내 안에 대봉을 향한 마음이 꿈틀거렸다. 동생한테 연락해 높은 곳에 감이 그대로 있으니 따보자고 설득했다.
장대를 가지고 따보려 해도 이미 감나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 있어 닿지 않았다. 원숭이가 아닌 이상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감을 따는 건 무리였다. 톱을 가져와 높이 솟은 가지를 잘라 땅으로 끌어내려 따보기로 했다. 남자들은 톱질을 해서 나뭇가지를 베어 내리고, 여자들은 내려진 가지에 달라붙어 감을 따면 된다고 생각했다. 초보자들이었던 우리 가족(동생, 제부, 남편, 아들, 딸)의 감 따기는 그야말로 코미디였다. 일단 키가 큰 장정들이 톱을 들고 나무 밑동에 올라 자리를 잡았다. 그 광경을 주변에서 올려다보는 조무래기들은 입만 가지고 코칭했다. 노를 저을 줄 모르는 사공들만 잔뜩이라 톱은 트위스트를 추었다. 여기저기 톱을 가져다 대며 이 가지를 자를까, 저 가지를 자를까 우왕좌왕이었다. '이거 잘라라, 저거 잘라라.' 말들은 많았고, 감이 잔뜩 달린 가지가 잘려 내려오면 동생은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어느새 감나무의 가지는 아낌없이 잘리고 주황빛 열매는 공중이 아닌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담고 또 담았다. 주워 담고 보니 자루 한가득이다.
혼자서는 움직이지 않았을 남편도 동생 부부와 아들, 딸이 함께 하니 전생에 나무꾼이었던 것처럼 신나 있었다. 가족 모두 체험학습 나온 어린아이들 같았다. "이제 그만 정리하자." 멀찍이서 감나무를 보니 꼴이 우스꽝스러웠다. 높이 있는 가지를 전부 없애버려 양옆으로 벌어진 앙상한 모양의 가지들만 남아 있는 게 아닌가.
불현듯 할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나무를 생각하고 욕심내지 않았을 할머니. 그렇게 매해 열매를 맺어주는 감나무에 대한 예의를 갖춘 할머니였을 테니 말이다. 뭣도 모르는 젊은이들이 나무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적잖이 실망할 것 같았다. 우리를 향해 양팔 벌려 자비로운 모습을 하고 서있는 감나무를 보고 후회가 밀려왔다.
"어떡해. 내년에는 감을 못 먹겠네. 감나무 죽는 거 아니야? 가지를 다 잘라버려서 열매가 안 열리겠어."
여러 해 동안 나는 무심했고 대봉 감나무에 어떠한 정성도 쏟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감나무는 나에게 대봉을 내어주며 무제한적인 단맛을 선물했다. 감씨를 싸고 있는 과육은 세상 어떤 젤리보다 쫀득하고 달콤했다. 서툴렀던 우리가 언제 다시 열매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올 겨울 유난히 추워하며 앙상하게 서있을 감나무에 자꾸 마음이 쓰인다.
사진출처 : pixabay-Gray_Rh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