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돌프 슈타이너에 따르면 상상력은 공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한다. 공감이란 자신과 세계를 분리시켜 대상화하는 반감과 달리 자신과 세계가 화합하는것을 의미하며 이 화합은 상상력이 단순한 내적인 의식을 넘어 타인과 세계로의 윤리적 확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공원 벤치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셀린느와 줄리는 서로의 낯섦에 대해 전혀 반감 가지지 않고 오히려 상상력을 통해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들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놀이다. 그들은 영화 초반부터 마치 경찰과 도둑잡기 놀이를 하듯 신나는 추격전을 벌인다. 원래는 떨어뜨린 물건을 다시 가져다주려는 사소한 의도에서 시작된거였지만 그들의 상상력은 이 사소한 것마저 재미난 놀이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놀이의 역할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탐구가 된다.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은 근본적으로 놀이하는 존재라고 역설했던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수단과 목적의 분리는 노동이지만 수단과 목적의 일치는 바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마술사 셀린느와 마술애호가 줄리 모두 일종의 놀이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술은 마술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셀린느의 마술을 지켜보던 한 남성관객이 “이건 사기야!”라고 소리치는 장면도 나온다. 아마도 그 관객은 마술을 본다고 해서 쌀이 나오지도 과일이 나오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실망한 모양이다. 하지만 마술의 진정한 매력은 바로 그 비생산성에 있다. 수단을 위한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마술은 비로소 놀이가 된다. 장자는 삶의 중요한 부분이 쓸모없음에서 결정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사회가, 관습이, 타인이 비생산적이라고 말하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즐기는 것이라면 그거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쓸모없음이 쓸모를 만들어낸다는 장자의 역설적 통찰은 영화의 가치에도 적용될 수 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기존의 전통예술들은 그것이 지닌 원본성과 유일성으로부터 아우라라는 권위적 가치를 얻어왔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가 등장하고나서부터 그 가치는 몰락한다. 영화는 필름이라는 기술을 통해 이곳저곳에 복제되어질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영화의 그 가치없음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게 된다. 셀린느와 줄리는 단순히 극영화를 수동적으로 감상하는데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직접 그 극영화 속으로 뛰어들어 능동적으로 이야기를 해체하고 재구성하고 다시 해체하는 주체가 된다. 원본의 아우라는 사라졌지만 대신 접근성과 유희성이라는 가치가 새롭게 지어진 것이다. 눈속임에 불과한 마술쇼, 픽션에 불과한 극영화는 곧 우리의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놀이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