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당나귀 발타자르(1966, 로베르 브레송) 비평

by 김명준

서론


동물권 철학자 피터 싱어는 벤담의 공리주의를 받아들여 동물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쾌고감수능력이 있기 때문에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동물의 권리를 내재주의적 관점에서 주장한 학자인 레건이 있는데 레건은 내제적 가치를 지닌 모든 동물들은 삶의 주체라고 주장하면서 “존재를 수단이 아닌 목적 그 자체로 대우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의 범위를 인간에서 포유류 이상으로 확장했다. 피터 싱어는 이익(쾌락과 고통)을 중심으로, 톰 레건은 권리를 중심으로 동물의 도덕적 지위를 주장한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이익’, ‘권리’ 같은 개념들은 모두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들에 불과하다. 동물은 어떠한 이익이나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그저 존재할 뿐인데 말이다. 이들보다 약 10년 앞서 발타자르라는 당나귀에 대해서 영화를 만든 로베르 브레송 감독은 이러한 인간의 관점을 넘어서 카메라라는 기계의 눈을 통한 새로운 관점으로 동물을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카메라를 조작하는 것이 인간(브레송)이라는 사실이 아니라, 카메라가 세계를 기록하는 물리적 과정 자체가 인간의 지각 구조와는 다른 지평을 연다는 점이다.


본론


로베르 브레송 감독은 배우들에게 연기를 하지 말라고 자주 지시한것으로 유명한데 발타자르는 그러한 브레송의 절제 스타일에 가장 완벽하게 어울리는 캐릭터가 된다. 영화 평론가 로저 에버트도 지적했듯, 영화엔 ‘반응 숏’ 이라고 불릴만한 순간이 거의 없으며 발타자르는 카메라를 의식하지도, 관객에게 감정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가 학대를 받을때조차 반응숏은 없다. 그 결과, 관객은 발타자르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보단 발타자르를 절대적 타자(레비나스) 그 자체로서 바라보게 되며 발타자르가 가축이라는 단순한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레비나스 본인은 타자윤리를 비인간 동물에게도 적용하는 것에 대해 꺼려했다는 말이 있으나, 최근에는 Peter Atterton 등에 의해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를 비인간 동물에게도 적용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를 통해 관객에게 언제 웃고 언제 울어야 할지 알려주는 다른 대부분의 영화들과는 달리 영화는 그러한 연기를 제거함으로써 해석적 공백을 만들고 관객 스스로 그 공백을 메우도록 만든다. 브레송의 의도 자체가 역설적으로 비의도성의 효과를 연출하는데에 있으며 관객의 위치를 수동적인 감상자에서 능동적인 사유자로 재구성해놓는 것이다. 무표정이 때로는 가식적인 연기들 보다 훨씬 더 많은 진실을 담아낸다. 영화는 양떼 사이에서 어미의 젖을 먹는 새끼 발타자르와 같은 눈높이의 아이 레벨 숏으로 시작된다. 카메라와 관객과 발타자르는 동등한 위치에 놓인다. 그리고 아이들이 발타자르의 머리에 물을 부어 세례를 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이들의 순진하고 단순한 이 제스처는 인간만이 천국에 가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리를 정면으로 흔들며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기존의 가톨릭 교리대로면 이 장면은 신성모독이나 다소 우스꽝스러운 장면으로 읽힐 수 있었겠지만 이 영화가 개봉한 1966년 당시 프랑스는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전통적, 신학적 권위가 흔들리던 시기였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 장면은 매우 급진적인 선언처럼 보인다. 그 이후 발타자르는 일생동안 수많은 주인들의 손을 거치게 되는데 그 주인들은 하나같이 결함이 많거나 불완전한 인간들이다. 아무 이유 없이 대놓고 발타자르에게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는 불량배 제라르, 직접적인 폭력은 없지만 제라르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발타자르에게 간접적 피해를 끼치는 마리, 본인에 대한 모욕은 참을 수 없지만 발타자르는 버려야 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마리의 아버지, 비록 제라르의 폭력으로부터 발타자르를 구해준적은 있지만 결국 똑같은 범죄자일 뿐인 술꾼, 발타자르를 단순한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서커스 단원 모두 본의었든 본의가 아니었든 발타자르에게 고통을 준다. 이어지지 않고 파편화되어있는듯한 플롯은 그러한 인간들의 행동동기를 이해하려는 모든 시도를 막고 발타자르가 처한 상황과 실재하는 고통 그 자체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것 처럼 보인다. 또한, 학대받는 발타자르의 몸을 세부적으로 응시함으로써 발타자르의 고통받는 육체를 물질 그 자체로서 집중하게 해준다. 마지막 장면에서 양들의 방울 소리가 죽어가는 발타자르에게서 점점 멀어지는게 느껴질때도 카메라는 멈춰서 죽어가는 발타자르의 모습을 끝까지 응시한다. 이때는 어떠한 신체 부위가 아닌 육체 전체를 응시하는데 발타자르라는 하나의 고유한 세계 전체가 사라지고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발타자르가 서커스 우리에 갇힌 동물들(호랑이, 곰, 원숭이, 코끼리)과 눈이 마주치는 장면이다. 발타자르와 동물들 모두 눈을 마주쳤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그들의 침묵과 클로즈업된 무표정 속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다. 같은 처지의 동물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무슨 감정을 느꼈을지 우리는 알 방법이 없다. 그건 인간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그들 존재끼리만 통하는 침묵의 대화였기 때문이다.(이걸 침묵의 대화라고 말하는것도 부적합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언어의 역설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이미 말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면서 침묵을 깨뜨린것처럼.) 나는 나의 만성통증 속에서 고통이 얼마나 전달 불가능한지 배웠다. 그래서 발타자르의 고통을 재단하지 않는다.




결론


사상가들은 존엄에 대해서 논할 때 쾌고감수능력, 내재적 가치 같은 기준을 세운다. 그러나 발타자르의 존엄은 어떠한 능력이나 가치가 아니라 존재가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오며 마지막까지 버텨내고 살아낸 그 무용한 삶 자체가 존엄의 증거가 된다. 이 영화는 흑백이다. 브레송 영화들의 대부분이 흑백이다. 화가 출신인 그는 색채마저 의도적으로 버렸다. 왜냐하면 화가는 칠하기 이전에 포착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덕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는 동물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브레송은 포착한다. 데이비드 흄이 존재와 당위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면 브레송은 논증이 아니라 현상학적 진술을 통해 타자로부터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레비나스적 윤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 사이의 논쟁이 뜨겁게 이어지고 있는 요즘, 영화 속 발타자르의 존재는 어떠한 의미를 지닐까? 만약 발타자르 같은 당나귀가 내 곁에 있었다면 나는 당나귀를 어떻게 대했을까? 누벨바그가 기존의 영화 언어를 바꿈으로써 혁명을 했다면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라피는 영화 언어 자체를 거부함으로써 훨씬 더 급진적이고 매체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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