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횡단하는 사람

by 최고수정

어르신, 조금 늦더라도 안전이 제일 우선입니다


‘무단횡단 절대 금지’라는 현수막에 적힌 문구였다. 옆 동네의 사거리에 걸려있는 플래카드를 처음 봤을 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왜 빵~ 터졌을까. 노인들이 참 무단횡단을 많이 하긴 많이 한다 싶었다. 그렇게까지 웃길 일은 아닌데 왜 그리 웃겼는지. 문제의 심각성을 몰라서였을 것이다. 오죽하면 경찰서에서 건널목에 붙여 놓을 생각까지 했을까. 교통경찰들의 노고가 새삼 감사하다.


가끔 운전석 옆 보조석에 앉았을 때 무단횡단하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직진 신호를 받고 출발하려는 데 어디서 왔는지 홍길동처럼 나타나 잽싸게(실제로는 잽싸지도 않은 걸음으로) 정지선 앞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보게 된다. “어휴, 정말 할머니들은 막무가내야!” 운전자가 하려던 말이 내 입에서 먼저 쏟아져 나온다. 강제로 배려해 주게 되었을 때는 시간이 여유로울 때조차 기분이 좋지 않다. 하물며 마음이 급할 때는 진짜……. 무단횡단하는 사람을 비난의 대상으로 쉽게 올려놓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본인은 신호를 잘 지키는 보행자라는 자만심 때문이지 않을까.


동네에 있는 어느 횡단보도를 이용할 때였다. 오전 9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이른 시간 때문인지 도로에 다니는 차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인도에도 인적이 드물어서 지금이 주말 아침인가 싶은 정도였다. 나는 대상포진 예방 주사를 맞으러 가는 길이었다. 대상포진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다시는 앓고 싶지 않다. 주사가 97% 이상의 예방 효과를 보인다니 큰 망설임 없이 맞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어찌어찌하다 보니 미뤄지고 미뤄졌다. 근래 1~2주 사이에 해야 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주사 맞는 것이었다. 내 머리에는 온통 ‘오늘만은 꼭 병원 가야 한다’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미 병원에 가는 도중이었는데. 병원 건물 바로 앞이었는데. 오픈런 중이었는데. 횡단보도 앞에 서 있을 때 정지 신호가 다소 길게 느껴졌다. 정신을 끝까지 집중할 걸~ 잠시 건널목 신호가 아니라 도로 정지선 위의 신호등을 응시하고 말았다. 이 잘못이 결정적이었다. 조금만 있으니 빨간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는 게 아닌가. 나는 멍청하게도 그 신호가 내가 건너야 할 신호로 착각해 버렸다.


주변이 한적해서 나는 발걸음을 떼자마자 이상하거나 어색한 기운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횡단보도를 반 이상 지날 무렵이었나. 내가 지나는 건널목 쪽으로 우회전하려는 차가 시야에 들어왔다. ‘내가 건너고 있으니 초록 신호인데 저 차가 왜 안 멈추지?’ 이 생각이 스쳐 가는 찰나, 본능적으로 살아보겠다고 확 뛰어갔다. 천만다행으로 우회전 차가 속도를 줄여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나서야 알았다. 방금 전 신호위반 무단횡단을 했다는 것을. 어머, 내 정신 좀 봐. 그제야 건널목 신호가 초록으로 바뀌고 인도에 한두 명 서 있었던 보행자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한 게 보였다. 순간, 나를 발견하고 멈춰 준 운전자가 너무너무 감사했다. 이런 게 바로 생명의 은인 아닌가? 그분 앞에 꽃길만 놓이길!! 그리고 죄송한 마음이 엄청나게 커졌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쓸어내렸다. 한참 후에나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올해 들어 경찰서에서 현수막까지 제작해 가며 단속하려는 무단횡단하는 사람이 나였다. 큰 사고가 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다. 동시에 여유를 가져야 한다는 자각이 몰려왔다. 이번 일은 내가 해치워버려야 할 일에만 몰두하다 벌어진 실수였다. 주사 맞기로 한 것을 미루고 미루지만 않았더라도 느긋하게 신호 잘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이게 다 애를 키워서 그렇다고 변명하기엔 무리일까. 나 자신을 보살피고 건강을 챙길 시간은 실제로도 빠듯한데. 이 경험으로 나에게 말해본다. 차근차근, 안전하게. 하루에도 2~3번씩 아이에게는 하는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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