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책과 나 03화

영글어 가는 시간이 남긴 것

(feat. 대추 한 알)

by 최고수정

대추 한 알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 안에 번개 몇 개가 들어서서

붉게 익히는 것일 게다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드는 것일 게다


대추나무야

너는 세상과 통하였구나



이 작품은 내 마음을 강타한 대표적인 시다. 때는 20대 중후반. 장석주의 이 시에 반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상황은 퇴사 후 이직을 원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신입으로 입사하기 위해 도전할 때였다. 대부분의 구직자가 그러하듯 나의 하루는 새벽 일정, 오전 일정, 오후 일정, 저녁 일정으로 빡빡했다. 옹골찬 대추알로 영글어 가고 싶어 할 때 <대추 한 알>을 발견했다. 이 시의 1연은 합격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나를 응원해 주는 도구였다.


어떤 하루는 두 곳의 시험에서 떨어졌다. 결과 발표가 같은 날이었나 보다. 대부분의 언론사는 서류, 필기, 실기, 면접시험까지 서너 번의 전형이 이어진 뒤 최종합격자가 발표된다. A사의 1차 전형 발표일이 B사의 마지막 전형 시험일이기도 하고 최종 발표일이 될 때도 있다. 사실 입사 지원했던 회사의 개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탈락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원하던 단 한 곳의 신입으로 결정된다면 탈락한 날들의 밤을 보상받겠지만. 어쨌든 충격이 큰 날은 세상 허탈하고 눈앞이 막막해진다.


그럴 때면 시에 나오는 대추를 떠올렸다. 저 조그마한 것이 태풍도 이기고 천둥도 피하고 벼락도 물리치고 살아남다니……. 내 열매가 맺어지기에는 아직 태풍과 천둥까지밖에 없나보다, 벼락이 없어서 그런 것일 수 있으니 더 노력해 보자 다짐했다. 아니면 이제까지 내가 막은 태풍은 대형이 아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기도 했다. 나름은 혼신의 힘이었지만 소형 태풍까지의 힘이었나 보다, 더 키워서 중형이나 대형을 물리칠 정도가 되어야 합격하나 보다, 반성하는 계기로 만들었다. 어떤 날은 얼토당토않은(?) 불합격 통지를 받기도 했다. 한동안 울분에 차 얼어있기도 했고, 깡소주를 들이켜기도 했지만 정신을 가다듬을 땐 장석주의 이 시가 뭉근하게 나를 데워주고 있었다. 아, 이번엔 대형 태풍 대비로는 부족한 회사였구나 초대형 태풍을 이길 정도여야 했다고 이해하기도 했다. 그러면 왠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렇게 이 시는 나의 현실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다시 일어설 동력이 되었다.


그러다 2022년쯤인가 시를 다시 만났다. 굉장히 반가웠다. 그리고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과거의 나를 위로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즈음 나는 아이의 나이대로만 살고 있었다. 아들이 24개월 땐 두 살 아이 엄마, 여섯 살일 때 여섯 살 아이 엄마. 다시 만난 이 시는 나의 나이와 정체성을 살펴보게 해 주었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27살이었던가 언제였던가 떠올리면서 말이다.


무언가를 도전할 때 이 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제야 생각해 보니 이 시가 없었으면 다시 이력서를 쓰고 다시 시험을 보러 다닐 힘을 제대로 낼 수 있었을까. 당시 이 작품은 고되고 지난한 과정이 끝내 결실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다주었지만, 지나고 나서도 나의 현재를 응원해 주는 시가 되고 있다.


누구나 지금 견뎌내야 할 고난이 있을 것이다. 갈 길을 막는 벽 말이다. 태풍 종류나, 천둥 종류나, 벼락 종류나 장애물 여러 개를 거쳐야만 기다리던 튼실한 열매가 온다는 자명한 사실을 잊고 있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본다. 대추도 영글어 가는 시간이 반드시 있었던 것처럼 끈기 있게 기다릴 수 있길. 결과보다 과정을 볼 줄 알았으면 좋겠다.

keyword
이전 02화행운을 기대하는 최소한의 예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