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설정이라는 감옥탈출

by 서희

가끔 외출 하기 전에 오늘은 어떤 악세사리를 찰 지 고민한다. 예를 들어 목걸이만 할 지, 목걸이와 스마트워치 2개 정도만 찰 지와 같은 사소하면서도 은근 디테일한 고민이다. 근데 그 고민의 이유는 사소하지 않다.

이런 고민이 있을 때는 그 날 나만의 컨셉이 존재한다. 더 명확히 풀어내자면, 남들에게 보여지고 싶은 나의 이미지를 셋팅하는 것이다. 여성스러워 보이고 싶거나, 악세서리에 관심 없는 효율적인 사람처럼 보이고 싶거나, 스마트 해 보이고 싶거나- 놀라울만큼 종류가 다양하다.

내 자신도 인지하고 있는 점은 이런 고민은 빈 껍데기와 같은 이미지 메이킹이다.

이미 할 일로 꽉 차서 그런 고민을 할 마음의 공간이 없거나, 혹은 한마디로 '자존감이 높은 날'에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그 날 끌리는 악세서리를 차거나, 혹은 아예 하지 않거나. 어쨌든 나만 비밀스럽게 알고 있는 그 어떤 숨겨진 의도 없이 외출 준비를 한다.






대학 시절, 대외 활동을 하면서 친해진 남자 선배와 술을 마신 적이 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친해지고 싶은 사람 앞에서는 긴장을 했다. 이 선배와도 그랬다. 재치 있고, 알아두면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너 술 마시니까 좀 재밌다?"

내가 한 이야기가 재밌었는지 선배가 웃으며 얘기했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던진 그 말 한마디가 내 기준이 되어버렸다. '아 난 술을 마셔야 좀 재밌어지는 캐릭터구나, 내 매력을 보여주려면 술을 마시면서 친해져야 하겠구나.' 나의 마음은 멋대로 과잉 해석했고, 그 착각은 꽤 오래 갔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시끄러운 술자리를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자리를 정말 많이 주선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었던 것 같다. 당시엔 "나 이런 술자리 좋아해, 이런 자리에서 사람들이랑 잘 어울려" 라고 했지만 착각이었다.

한국사회는 술 잘 먹는 사람 좋아하고, 술에 관대하니까 이런 노력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뭐 아주 결실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렇게 "술 흥"으로만 통한 사람들과는 막상 연락 끊긴 지 오래다.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회사 생활에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피크(peak)를 찍는다. 나의 경우,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성격과 누구와도 살갑게 지내는 캐릭터를 머릿속에 입력한 후 행동했다.

물론 모든 말과 행동이 완벽히 다른 사람을 연기하듯이 거짓된 건 없다. 다만 실제 원래 나의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기 보다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의도한 캐릭터처럼 보이길 바랬다.


초반에는 할 만 했다. 평판도 나름 나쁘지 않게 쌓여지는 것 같고 하니, 좀 피곤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이나 내가 하려던 말을 살짝 필터했다. 그러다가 연차가 쌓이고, 아는 동료들도 많아지고 하니, 어느덧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굳이 의식적으로 말과 행동에 필터를 하지 않아도 잘 지냈다.

내 마음 속에서는 필터를 걸었다가 뺐다가 난리통이었는데- 밖은 고요했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도 이 난리통을 몰랐을 거다.


실은 회사 뿐만이 아니었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캐릭터에 쬐끔 집착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은행이나 주민센터에 갈 때 호락호락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싶거나, 가끔은 엄마에게 원래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상냥한 딸처럼 되고 싶거나, 일을 효율적으로 잘 하는 선배처럼 보이고 싶거나-

소설 속 인물들처럼 다양하고, 심지어 어떤 캐릭터들은 극과 극으로 모순되기도 하다. 이중적이다.






나이가 들고, 에고(ego)가 줄고, 그리고 캐릭터 고민이 사치가 될 만큼 사느라 바빠지면서 이런 캐릭터 설정은 이제 거의 없어졌다. 이 글 맨 첫 문단에 얘기했듯이 아직 살짝 남아있긴 하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줬다.


그리고 자녀가 생기고 나니 그 살짝 남아있던 찌꺼기 마저 사라지는 것 같다. 물리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어져서 라고 볼 수도 있지만, 단순히 그것가지고는 설명이 안된다. 나 자신보다 자녀를 더 앞에 두면서 남아있던 에고를 다 내려놓았기 때문인가? 아직 잘 모르겠다.

아기를 데리고 다니면서 예전만큼 외모에도 신경을 못 쓴다.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로 나갈 때도 있고, 머리 안 감고 모자 쓰는 걸 너무나 싫어했던 나이지만 요샌 그냥 모자 쓰고 외출하는 경우도 많다. 신기한 것은 캐릭터 설정 왕창하고 꾸미고 나갔을 때보다 지금이 더 마음의 여유가 넉넉하다. 편안하고 자유롭다.

(물론 너무 오랫동안 밖에 못 나가고, 츄리닝 차림이면 사람이 우울해진다 -_- 그건 어쩔 수 없다. 논외다!)




이번 글은 얼마 전부터 문득 든 생각을 조금씩 구체화 시키면서 쓰게 됐다. 우리 아기와 놀면서, 그리고 우리 아기 눈이 나를 반짝반짝 볼 때 생각이 났다. 남을 가장 많이 의식했던 20대 시절, 남 눈치를 많이 보게 되는 직장생활에서의 나의 생각들, 의식의 흐름들. 그게 또 어떻게 변해왔는지. 우리 딸은 엄마보다 똘똘해서 조금 더 빨리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다 희망하며 썼다. 그리고 스스로가 세운 감옥에서 제 발로 잘 걸어나온 내 자신에게도 대견스럽다 얘기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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