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

by 소라


비릿한 생선냄새가 역한지 고개를 돌리고 길을 걸어가던 H는 순간 스치듯 후각으로 몰려든 깊은 바다향에 도취되어 문득 걸음을 멈춘다. 미역이다. 그것도 넓은 채반에 이제 막 말리기 시작한 누워있는 미역들이 반짝반짝한 몸을 빛에 내맡기고 수분하나 없이 쪼그라들 운명에 널부러져 바람에게 인사를 한다. 천천히 지나가라고. 빛만으로도 충분히 마르고 있으니 좀더 자신을 붙잡고있고 싶다고 바람에게 타이른다. 그런 미역을 투박한 손으로 하나하나 정리해가며 채반을 더 빛이 잘 드는 곳으로 옮기던 손길이 H를 바라본다. 뭐 볼 거 있냐는 투로 퉁명스럽게 미역들을 툭툭 던지듯 바구니에 척척 걸치는 모습이 한두 해 해 본 솜씨가 아니다. H는 그녀들의 손에 맡겨지는 미역들이 차곡차곡 개켜지는 것을 보며 출산 후 꾸역꾸역 미역국을 먹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매일 먹는 미역국에 신물이 나 몰래 버리기도 하고, 남편에게 떠밀기도 했었는데, 저리도 정성스런 손길이 갔다 생각하기 괜스레 미안해진다.

갑자기 소란스럽다. 미역 널던 할머니께 할아버지가 다가와 역정나신 듯 큰 목소리로 할머니를 나무라는데, 할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시고는,

‘뭐 그카노. 사람이 순하게 살아야지. 마, 드 가소!’

할머니의 억양은 할아버지의 기세를 누를 정도는 아니었는데 할아버진 금세 웃으시며 도란도란 미역을 정리하신다. 오래 살면 저렇게 짜증 속에서도 다정함이 묻어날까. 이 곳의 바다향은 저분들의 오래묵은, 쾌쾌한, 그렇지만 그리운 냄새같은 아주 푸근한 향이라 더더욱 좋아진다. 시골집에서는 늘 메주를 만들었는데 그 메주를 말리는 동안 방 안에서는 꽤 오랜 시간 쿰쿰한 냄새가 진동을 해 식구들이 온 신경을 곧추세우고 짜증을 내고는 했다. 하지만 H는 그 냄새가 좋아 방 구석에서 책도 보고 멍 때리고 있다 잠이 들기도 했는데, 그 냄새 같다는 생각을 하며 마을 어귀로 걸음을 옮긴다. 마을 구석구석을 돌고 있던 H는 무거워 잘 들지도 않던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찍어대다 저 멀리 해상산책공원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처음 이 곳에 온 이유를 생각한다. 바다 위의 공원이 어떤 걸까 그게 궁금했는데, 멀리 갖가지 색의 등산복을 입은 무리들이 탄성을 내지르며 셀카봉을 들고 멋진 풍경에 자신을 넣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는 궁금하지 않다. ‘나 여기 놀러왔어요.’ 타인의 무의미한 관심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 타자에 의한 존재의 인식이 공허하다. 타자가 없으면 나도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저들도 이곳 주민들처럼 어디선가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고. 그 일에서 멀어져 잠시 쉬러 왔을 뿐인데도, 원래는 자연스러웠던 사람들인데도, 억지로 인식을 당하려는 것 같아 그곳을 보지 않기로 했다. 억지스러움. 자연스럽지 않음이 두렵다.

다시금 주민들.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할머니는 미역을 최대한 크게 펼치기 위해 다리를 쩍 벌리고 하나하나 미역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인생 별 거 없다고 이렇게 하나씩 펼쳐놓다 보면 다 똑같은 거라고. 삶 그대로를 안아들면 자조할 일도 없어진다고. 묵묵히 일상을 꾸려가는 사람들 앞에 왜이리도 작아지고 가벼워지는지. 보이지 않는 깊숙한 바다향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 셔터를 눌러대던 손가락을 멈추고, 발끝까지 냄새를 받아들이도록 깊게 깊게 숨을 들이쉰다. 잊지 않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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