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바람흔적미술관

by 소라

고개를 들어 산을 향하는 내게 다가온 소리.

그 소리였다.

김치찌개를 끓이다 뜨거운 찌개에 손가락이 스쳤는데,

‘아! 뜨거워!’하고 슥슥 옷에 손을 닦고는 다시 찌개를 끓이기 위해 두부를 꺼내들었다.

또각또각

찌개에 넣을 두부를 자르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어 두부의 연한 결을 스친 칼날에 나도 모르게 힘을 주게 돼 두부를 받치던 도마를 매몰차게 쳐버렸다. 칼끝과 도마가 마주하는 소리가 어린 여자의 구두소리 같아 연한 살결을 짓뭉개버리고픈 충동에 칼등으로 뭉툭하게 두부를 으스러트려버렸다. 손 데었다고 화상연고 바르며 호들갑을 떨면서 엄마에게 징징대던 나는 어디로 가고, 무심히 옷에 슥슥 닦고 잠시 내 몸하나 살필 겨를 없이 무심코 지나가버리는 내가 너무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핸드폰 케이스에는 음식을 하겠다고 인터넷 검색하던 티내느라 고춧가루가 껴있고,

네일 아트를 받겠다며 손톱을 기르며 내일 내일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손톱 틈새에 밀가루며 나물 같은 재료들이 껴있고,

식탁 위 수저통 사이에 내 몸 건사하라고 엄마가 준 호박즙이 껴있는데

그것들이 나 같아서 눈물이 났다.

어디든 껴 있는 존재. 혼자 스스로 서지 못하고 어디든 껴서 부록처럼 살아가는 인생이 나 같아 서글펐다.


그럴 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작은 미술관 옥상 위의 나였다. 결혼하기 전 친구들과 함께 했던 그 곳은 잠시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뭇잎이 어떻게 흔들렸는지, 물결이 어떻게 파동을 이루며 나아가는지, 구름 하나하나가 어떻게 흩어지는지까지도 기억이 났다. 옥상 위에서 작은 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풍경 하나하나 자세히 보겠다며 게슴츠레 눈을 뜨고 하나씩 살피던 내 모습이었다.

눈을 감으면 마치 그 곳에 서 있는 것 같아 언제고 꼭 다시 한 번 가리라 다짐하던 곳이었다. 왜 그랬을까.


10년 만에 기회가 왔다.


그 어느 곳을 가지 않더라도 이 곳은 꼭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숙소에서 걸어서 걸어서 찾아갔다.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씩 철제계단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옥상 위로 조심스레 올라갔는데

.

.

.

.

나는 그 곳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었다.


늘 생각했던 하늘의 빛깔도 구름이 흩어지는 순서도 물결의 흐름도 내가 기억하는 그 곳이 아니었다. 왠지 눈물이 났다. 여길 보겠다고 그 먼 거리를 왔나 싶어 등 뒤에서 세차게 때려대는 바람에다 짜증을 확 내며 돌아서는데, 그만 울어버렸다.

휙 하는 바람소리가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바람소리에 그 때 그곳이 다시 눈 앞에 펼쳐졌다. 나는 그곳의 장면이 아니라 바람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산을 향하는 내게 다가온 소리.

그 소리였다.

이 소리를 그리워했구나.

이 때를 그리워했구나.

바람이 잔잔해지려하면 계속해서 바람소리가 듣고 싶어 바람이 모이는 곳으로 걷고 또 걸었다.

바람이 머물다 가는 곳. 머물고 머물다 흔적이 남는 곳.

그곳이 바람흔적미술관이었다.

사랑을 하면 오감을 동원하여 대상을 기억해내려 한다는데, 유난히도 소리가, 스쳐가는 느낌이 이 곳을 기억하게 해 주었다.

지금도 외로운 시간에 혼자 방 안에 앉아있으면 그 순간의 소리가 느낌이 나를 감싸 그 공간에 나를 던져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금 슬퍼져도 외로워도 나는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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