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가지였다 나는.

by 소라

선생님 저 돈 벌러 가야 하는데 언제 나갈 수 있나요?

병원 60일 차. 의사 선생님의 회진 때 아빠가 하신 말씀이란다.


-아이고 환자분 이렇게 많이 다치셨는데 무슨 돈을 벌러 가세요? 다 나아야 가죠.

-선생님 우리 애들 시집 장가보내려면 돈 벌어야 해요.

-아직도 시집 장가 안 보내셨어요?

-네. 우리 애들 어려서 아직 안 갔어요.

-지금이 몇 년도인데요?

-87년도요.

-......

사고 당시 뇌출혈이 심했는데 기억을 관장하는 부분을 피가 누르는 것인지 멀쩡하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른 이야기를 하고, 갑자기 누구냐고 묻기도 한단다. 가져야 할 기억들이 많은데, 가지고 싶은 기억만 붙잡고 있는 것인지 아빠는 30년을 거슬러 가버렸다.


아빠는 누구에게도 우릴 자랑한 적이 없다. 상을 받아도 장학금을 가져가도 공부하는 학생이 당연한 거지라고 말씀하셨고, 고생한다고 달큰한 애정 어린 말을 한 적도 없었다.

아빠의 사업에 대한, 돈에 대한 숭배는 가족보다 늘 우선이었고, 살기 힘들 때 저 어린 것들을 잠시 보육원에 맡겨야 하냐고 물었다 할 정도로 매정한 사람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했으며, 결혼도 아주 일찍해서 돌보아야 할 식구가 많았다. 사실 그 무게감이 어떤 건지 상상도 할 수 없지만 그랬다해서 사람보다 돈이라는 생각에 동조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내게 아빠는 돈을 좋아하는 속물일 뿐이었다.

그렇게 지금껏 생각해 왔다.


그런데 기억이 흔들거리는 아빠의 뇌에 책임이라는 단어가 각인되었다 한다. 아빠에게 돈은 책임이었던 것일까. 많은 식구의 밥을 먹여주어야 한다는 책임, 일생을 배우고 싶어 안달했으나 돈이 없어 이루지 못한 배움에 대한 책임, 낳아놨으면 인간구실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 현기증이 났다. 성공하는 인생은 없다 생각했다. 그래서 스스로 늘 실패하는 인생이라 생각했다. 실패하는 것임을 알고도 자처해서 살아가고 있다 생각했다. 살아감이 실패를 증명하는 삶일지라도 끊임없이 살아내겠다 했다. 하지만 이건 실패도 뭣도 아닌 생의 좌절이었다. 아빠의 생에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자식이라는 존재는 묵직한 책임이었고, 그래서 가벼이 여길 수 없어 그 흔한 칭찬 한 마디조차 내뱉을 수 없는 소중함이었다. 퇴행해 버린 아빠의 기억은 나를 분열하게 만들었고, 나의 삶을 고착화시켰으며, 우울이 넘실거리는 세계로 가 나를 흩어지게 했다. 나를 이루기 위해 모여든 구성품 중 상당 부분이 해체되어 낱낱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기억이 무너진 공허한 육신은 갈 곳 없어 헤매고 헤매었다.

아빠의 말 한마디는 본질을 꿰뚫지 못하고 곁가지로 흘러왔던 베어버려야만 하는 생을 살아왔음을, 그러한 오만함을 타고 이다음을 견디려 했던 믿음을, 옹졸한 해석을, 그에 따라 행동한 나라는 인간을 혐오하게 만들었다. 일상을 허용할 수 없었다.


항상 걸음을 걷다 보면 다가오는 삶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 삶이 결국은 생의 한가운데, 나의 한가운데로 돌아오는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나를 가둘수록 더욱 압도해 가는 나의 편협한 기억들은 걸을 수 없게 했다. 아니 걸어서는 안 되었다.

마음껏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내가 지금 얼마나 충격적인 세상에서 어떠한 격렬함을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따스한 봄기운을 맞으며 도란거리는 그들의 시선 속의 나는 나른한 낮시간에 빈둥대며 지나가는 풍경에 불과했다.

결국... 곁가지였다. 나는.

그렇게 내내 무너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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