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은 괜찮다

by 은색연필

11시간은 족히 걸리는 길이다. 자동차 바퀴는 달리지 못하고 그저 한 걸음씩 떠밀린다. 수도권에서 부산 시댁으로 가는 길은 명절이면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멀다. 붐비는 휴게소에서도 경쟁이 치열하다. 빈자리를 찾다 지쳐, 결국 핫바나 호두과자를 씹으며 다시 길게 늘어선 차들 틈으로 들어가기 일쑤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머리맡에 보이는 것이 있다. 어머니가 놓아두신 꿀물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인사드리기 무섭게 아침 식탁이 차려진다. 생선구이와 잡채, 온갖 나물로 식탁이 가득 찼다. 어머니 특기인 복어국도 빠지지 않는다.


배를 두드리며 일어서려면 어머니는 손수 만든 식혜를 넘치게 따라주신다. 밥알이 동동 떠있는 식혜는 편의점에서 사 먹는 가벼운 단맛과 다르다. 엿기름을 우리며 오래 기다린, 시간이 녹아있는 묵직한 단맛이다.


"이제 더 이상은 못 먹어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우리를 보며 어머니가 웃는다.


"과일은 괜찮다."


명절이 끝나도 어머니의 음식은 계절을 타고 찾아온다.


매년 찬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김장 택배가 도착했다. 빨간 고춧가루를 잔뜩 묻힌 김치를 꺼내 수육파티를 거하게 벌였다. 그러다 몇 해 전 시아버지가 편찮으신 일이 있었다. 걱정이 앞서 남편과 내려가 김장을 돕기로 했다.


차 안에 오래 앉았던 허리를 펴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쭈그려 앉아 양념을 버무렸다. 하룻밤에 다녀오려니 몸이 더 고단했다. 예상과 달리 어머니의 수고도 더 늘었다. 돕는 일손이 생겼다 여기셨는지, 절여 놓은 배추 포기 수가 늘어 있었다. 김장을 통에 담아놓기 무섭게 밥상도 차리셨다.


삼 년 간 김장을 도운 끝에 결국, 어머니께 단호하게 말씀드렸다. "양념만 조금 보내주세요." 이제 김치를 많이 먹지 않으니, 먹고 싶을 때 담가 먹겠다고.


커피와 토스트가 아침 식사가 된 지 제법 오래되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외식하는 횟수도 늘렸다. 어머니가 좋아하신다는 걸 안다. 그래도 팔순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식탁에서 접시 하나라도 더 빼고 싶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음식 준비는 끝날 줄 모른다. 냉장고엔 우리에게 싸주려고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이 빼곡하다. 다음 끼니는 뭘 드시려나 싶을 만큼 박스에 담아 주신다. "조금만 주세요." 하는 우리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진다.


햇살 좋은 날, 편안하게 책이나 읽어야지 하는데 전화벨이 다급하게 울린다. 어머니다.


"아이고~ 싸준 음식 안에 재첩국 있드나?"

"아뇨~"


냉장고 안에서 미처 챙기지 못한 재첩국을 뒤늦게 발견하신 모양이다. 재첩국 넣는 걸 잊으신 어머니의 안타까운 탄성이 쏟아진다.


전화를 끊고,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식혜를 꺼낸다. 식혜가 녹으며 얼어있던 밥알들이 깨어나 동동거린다. 천천히 한 모금 마신다. 묵직한 단맛이 혀끝에서 오래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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