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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르르, 콩 한알의 운명

#수필

또르르, 콩 한 알의 운명

왕나경


아침 햇살이 부엌을 은은히 감쌌다. 쌀을 씻으며 검정콩 몇 알을 함께 섞어 밥을 지으려던 순간, 콩 한 알이 또르르, 바닥으로 굴러갔다. 별 생각 없이 주워 담으려 했지만, 그 콩은 내 손을 피해 또 한 번 또르르, 다시 굴렀다. 이번에는 물 빠지는 입구 앞에 조심스레 멈춰 있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은 콩 한 알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다.


‘너도 살려고 그러는구나.’


콩 한 알도 어쩌면 살고 싶었던 걸까. 물살에 휩쓸려 하수구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그 작은 생명이, 마지막 힘을 다해 내 앞에 멈춰 선 것은 아닐까. 나는 그 콩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부엌 한편에서 솜을 적셔 작은 그릇에 콩을 조심히 눕혀 주었다.

‘그래, 너도 한번 살아보자.’


며칠 전, 소록도를 다녀온 기억이 포개졌다.

소록도.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끝끝내 삶을 붙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살아간 땅.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발자국.

나병이라는 질병의 굴레 속에서도 서로 손을 맞잡고, 노래를 부르고, 때로는 작은 웃음을 나누며 삶을 견뎠던 사람들.

그 무겁고도 따뜻한 숨결이, 오늘 아침 콩 한 알의 움직임과 고스란히 겹쳐졌다.


콩이 굴러 떨어진 것이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살겠다는 몸부림이었을까.

삶의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내게 보내온 조용한 구조 요청이었을까.


사람도, 콩도, 모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넘어지고, 굴러가며, 어떤 날은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걸터앉는다.

그럴 때,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 하나가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한다.


콩 한 알을 바라보며, 나는 내 삶도 소중하게 품게 되었다. 어쩌면 내 안의 작고 연약한 생명을 일으켜 세운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후, 콩에서 연둣빛 싹이 움트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또 한 번, 삶은 발아한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던 콩 한 알이 내게 가르쳐 주었다.

살고자 하는 마음은, 단 한 번의 기회에도 용기 있게 또르르 굴러 나오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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