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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Nov 17. 2019

이사해야 사는 남자:내게 맞는 집의 형태를 안다는 것

오늘 같은 날도 흔치 않을 것이다. 서촌에 사무실이 숙소 큐레이션 플랫폼 OOOOO에서 첫 기자간담회를 진행하며 서촌의 오래된 집을 개조해 만든 숙소 세 곳을 차례로 보여주었다. 내가 사는 곳도 서촌. 평소 수시로 지나다니던 골목에 그렇게 예쁘고 근사한 집이 있는지 미처 몰랐다. 


그곳들은 저마다 다 다르고 독특했다. 콘셉이 달랐고  이전 프로젝트와 다르게 콘셉과 분위기를 지향하며 내외부를 꾸민 덕에 가는 곳마다 보는 맛이 있었다. 첫 번째 집은 1956년 지은 적산가옥. 오래된 이층 집이었는데 제법 큰 뜰이 있었다. 그날은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나는 한참 행사가 진행되던 집에서 나와 처마 밑 의자에 앉아 비 구경을 했다. 단정한 정원, 골목 너머 맞은편 담장,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좋아서였다. 뜨근한 마루의 온도를 발바닥에 느끼며 둘러보는 내부도 운치 있었다. 마루도 벽도 천장도 온통 나무. 1층 침실 창문 밖으로는 '돌벽'이 있었고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계단을 올라 마주한 2층 침실 옆으로는 하늘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두 번째 집은 청와대 경호원이 지은 한옥이었는데 대들보부터 달랐다. 콩기름 발라 붙인 노란 장판도 정겨웠다. 넓게 뺀 정자는 어찌나 부럽던지. 그곳에 누워 바깥바람 쐬며 책 보고 하늘 올려다보며 느긋하게 누워 있으면 절로 힐링이 될 것 같았다. 세 번째 집은 10평 남짓한 한옥이었다. 도로와 면해 있지 않아 신축을 할 수 없는 맹지에 있는 집이라 집으로서 가치가 떨어져 오랫동안 싼 값에 매물로 나와있었다고 한다. 결국 주인을 찾지 못하고 숙박업소에서 그곳을 레노베이션해 사용하는데 그야말로 놀라운 변신이었다. 침실 옆으로 동그란 창문을 달아 바깥 정원을 품게 하고, 거실 한편에 욕실을 만들어 맞은편으로 펼쳐진 주택가와 산세를 감상할 수 있게 했다. 1인을 위한 힐링의 장소. 우리 모두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런 곳에서 1박을 할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독이 깨끗하게 빠져나올 것 같았다.  


춥고 불편해도 단독 주택에는 단독주택만의 서정과 풍경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사람의 결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집에서는 없는 것이라 충분히 지켜낼 만하다. "다 쓸어버리고 새로 짓는" 국가적 개발 논리는 제발 그만 됐으면 좋겠다.


아파트는 또 아파트 나름의 아늑함이 있지만 나는 예전부터 단독주택의 '서늘한 공기'가 좋았다. 바깥 풍경과 온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달까. 단독이나 한옥에서는 더 자연스럽고 깊이 계절을 느꼈던 것 같다. 한옥에서 살았던 5년이 특히 그랬다. 봄은 봄, 여름은 여름, 가을은 가을, 겨울은 겨울 같았다. 비문 같지만 실제로 그랬다. 각각의 계절을 오롯이 느꼈기 때문에 그렇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다. 봄은 꽃 심고 향기 맡느라 여름은 더위와 씨름하느라 바빴다. 가을은 유독 빨리 사라져 연인을 떠나보내기 싫은 애끓는 사람처럼 하루하루 흐르는 계절을 안타까워하며 보냈다. 11월까지 출몰하는 모기는 중간중간 살의를 느끼게 했고. 겨울은 가을은 춥고 모질었지만 그 계절이 혹독하면 혹독할수록 이듬 해의 봄이 아름다웠다. 몸을 절로 웅크리게 했지만 가래떡을 구워 먹고 따뜻한 보리차를 마시는 즐거움도 컸다. 낭만은 추위에 있다는 말은 어찌나 맞는 말인지.  


예기치 않게 여러 가지 형태의 집에서 살아봤다. 신혼은 아파트에서 했고 이후 빌라에서도, 한옥에서도 살아봤다. 이렇게 저렇게 취향과 운명이 흘러들어 지금은 협소 주택을 짓고 산다. 이 세상에 태어나 경험해야 할 것이 수두룩하지만 내게 맞는 집의 형태가 어떤 걸까 탐험하는 것도 그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살게 돼서 자연스레 드는 생각이지만 이렇게 알게 됐으니 주변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다. 아파트에 살 때는 그곳밖에 몰랐다. 편하고 뿌듯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아파트에 산다는 무형의 자부심도 있었던 것 같다. 빌라도 고쳐 사니 살 만했다. 물론 집값은 거의 오르지 않았지만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진다면 하루하루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언덕에 위치해 전망이 끝내주는 빌라도 많다. 오며 가며 다리가 좀 아프지만 운동한다 생각하면 그만이다.


지금껏 내게 꼭 맞는 집의 형태는 한옥이다. 지금의 협소 주택도 만족스럽지만 한옥이 주는 생생한 삶이 가끔 그리울 때가 있다. 협소 주택에서 창문을 통해 보는 전망은 무척 좋지만 그건 이를테면 간접적인 것이다. 시각적으로 아 좋다, 하고 그만인 것. 반면 한옥에서는 끝내주는 풍경은 없지만 캠핑 의자에 앉아 눈을 감으면 바깥공기, 따사롭게 비추는 해가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감성이 예민해지는 날은 내가 식물 같고 공기와 볕이 내 안으로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맛을 알게 되면 한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손 많이 가고, 챙길 것 많고, 고생스럽지만 다 괜찮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소일거리가 즐겁기도 하다. 몸을 가만 두지 못하는 내가 그랬다.


이사를 많이 다니면서 이런 집 저런 집에 살아본 시간이 나만의 고유한 경험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퇴사까지 일반화되는 현실에서 계속 이사를 다녔던 세월이 뭔가 차별화된 콘텐츠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친구들들과 제목도 정했다. '이사해야 사는 남자' 하하. 그런데 책 내자는 데가 없네 ;;;; 


잠시 옆길로 샜지만 다양한 형태의 집을 경험하며 내게 가장 맞는 곳을 찾아내려는 노력도 꼭 한 번 해 볼 만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다. 집은 그야말로 평생의 둥지니까. 회사 없이는 살아도 집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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