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야 자기 선물이야. 가서 열어 봐"
저렇게 말하는 선물은 기대도 안 한다. 내가 원하는 선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옷이나 신발, 가방이 좋은데 아내는 내가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물건을 마음대로 고르고 "이런 거야말로 당신을 멋있게 하는, 꼭 필요한 물건이야~" 하며 안긴다. 작년 결혼기념일 때는 우리 동네에 있는 패션 편집매장 바버숍에서 체크무늬 장우산을 사 왔더랬다. 콜린 퍼스가 영화 <킹스 맨>에서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며 휘둘렀던 우산과 비슷했다. 난 질색을 했다. "아이고 돈 아까워. 우산 쓸 일 며칠이나 된다고. 집에 널린 게 우산이잖아. 여기저기서 사은품으로 받은 것도 많고. 참 미쳤다." 아내는 당연히 서운해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마음에도 들지 않고 돈도 아까워 "얼마 줬냐?" "설마 10만 원 넘는 건 아니지?"(넘었다) "영수증 갖고 있지? 내가 환불해올게"하고 속을 긁었다. 아내는 "자기는 정말 안목이 낮아. 돈, 돈 하는 것도 싫어. 한마디로 정말 별로인 사람이야"라고 했다.
그런 내력을 만든 사람이 준 선물이니 이번에도 마음에 안 들 것이 뻔했다. 바로 내려가 보지도 않았다. 이사 온 협소 주택은 3층. 계단이 은근히 많아 피곤한 날엔 터벅터벅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기가 싫다. 깜빡 잊고 핸드폰이나 속옷을 가지러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하는 일이 생기면 하, 한숨이 나올 때도 있다. "어떻게 선물을 주는데 열어볼 생각도 하지 않냐? 진짜 싫다"는 말과 함께 다음 날 아침 어쩔 수 없이 택배 박스를 열었다. 테이프로 친친 감아 영 뜯기가 불편했다. 그렇게 나온 물건은 정원용 호스. 손잡이를 잡고 빙빙 돌리면 호스가 길게 길게 빠져 그 줄을 잡은 채로 쏴아아 정원에 물을 주는 그런 호스였다. 정원이라고는 코딱지만 한 데 그런 곳에도 이런 호스가 필요할까? 싶었지만 뭐 나쁘진 않았다.
문제는 그런 물건은 약간의 조립과 설치가 필요하다는 거다. 난 그런 물건들이 정말 질색이다. 남들은, 그런 물건을 보면 어떻게 연결하라는 건지 탁 하고 답이 나온다는데 나는 IQ가 낮은 건지 영 감이 안 온다. 신혼 때는 이케아 수납장을 조립하면서 낑낑 대다가 "어떻게 이런 걸 못하냐?" 하는 아내 말에 발끈 해 싸움을 한 적도 있다. 그런 수모와 무시를 안 당해야 할 텐데, 조심조심 안내문을 읽었다. 다행히 독일제라는 이 호스의 디자인은 그야말로 직감적이었다. 여긴가? 하고 연결하면 탁 들어맞았고 저긴가? 하고 꽂으면 딱 들어갔다. 난코스는 수도와의 연결이었다. 척 보니 수도에 끼고 아래쪽에 있는 잠금 장치를 태엽 감듯 계속 돌려 고정을 하는 것 같았다.
난 이런 걸 할 때 어디까지 잠금쇠를 돌려야 하는지 감이 없다. 너무 세게, 끝까지 돌리다 연결 부위가 부러져 버린 경우도 많았다. 이쯤이면 고무 바킹과 수도꼭지가 견고하게 맞물린 것 같아 수도꼭지를 돌렸다. 치~하고 호스로 물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총처럼 생긴 분사기의 아래쪽 버튼을 누르자 치, 치 공기 새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 수도꼭지에 맞물려 놓았던 호스가 빠져나가면서 쏴아~~~ 물이 솟구쳐 오르며 천장과 분수 대포를 쏘아 올렸다. 젠장. 아내에게 보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황급하게 수도꼭지를 잠그고 흥건하게 고인 물을 걸레로 쓸어 담고 밖에서 짰다. 이런 거 싫다니까...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설명서를 다시 제대로 봤다. 배송품에 수도꼭지도 딸려 왔는데 그걸 연결해야 하나 싶어 기존에 박혀있던 수도꼭지를 돌려보기도 했다. 아무래도 그건 아니었다. 잠금쇠를 끝까지, 아주 단단하게 돌려야 하는 걸까? 하고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빡빡하게 돌린 후 긴장된 마음으로 천천히 아주 조금씩 수도꼭지를 돌렸다. 아, 다행이었다. 물은 새지 않았고 분사기 버튼을 누르자 물이 촤아 나오기 시작했다. 혹여라도 아까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어쩌지 싶어 수도꼭지를 세게는 못 틀었다. 설명서 사진에서는 물이 그야말로 총처럼 나와 삽에 묻은 흙도 깔끔하게 닦아내는 것 같았지만 내가 튼 물의 세기는 초등학교 남학생 오줌줄기 정도였다. 그래도 아까 같은 혼비백산이 일어나는 것보다는 낫다. 조심조심 호스를 잡아당기며 정원(이라고 쓰지만 겨우 캠핑 의자 하나 갖다 놓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다) 한쪽으로 심은 조팝나무에 물을 주었다. 물도 잘 나오겠다, 호스도 견고하게 연결된 것 같겠다, 내친김에 집 앞쪽으로 작게 만든 화단에도 물을 주었다. 쏴아, 키 큰 대나무 줄기에도 물을 뿌려 주었다. 제법 근사한 경험이었다.
다시 호스를 감아 집 뒤쪽으로 옮겨 놓으며 설명서를 다시금 보자니 GARDENA라고 쓰여 있었다. 독일어로 가든이란 뜻인 듯했다. 영어로는 GARDEN, 독일어로는 GARDENA. 이 얼마나 쉬운 변환인가. 유럽 사람들이 영어를 잘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알파벳을 기본으로 움직이는 그들에게 영어는 식은 죽 먹기인 것이다. 아내 말을 들으니 정원용품은 독일과 일본제가 세계적으로 가장 알아준단다. 종류도 많고 내구성도 뛰어나고 디자인도 훌륭하다. 뒷면을 보니 유럽권 나라들이 쭉 나열돼 있고 그들의 언어로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다. 슬로바키아, 러시아, 터키, 폴란드, 체코, 네덜란드, 핀란드... 아시아에 속한 나라는 한 곳도 없었다. 언어, 경제 블록 같은 단어로 엮인 나라들이 아니라 '정원'으로 유대한 나라들 같았다. 이런 정원 용품이 어느 정도 팔리는 나라들로 선별해 표시해 둔 것일 텐데 그럼 이들 나라에서는 정원 가꾸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인가? 포르투갈에는 '창문 하다'라는 동사가 있단다. 스펠링을 치자면 janealar. 창문 밖 풍경을 보며 아늑하고 편안한 시간도 갖고 그런 가운데 기운도 얻는다는 뜻일 거다. 그렇다면 '정원 하다'는 동사도 말이 되지 않을까? 나에게 딸린 정원을 가꾸며 보내는 좋은 시간.
솟구치는 사고도 있었지만 물을 주고 물을 뿌리는 시간은 나쁘지 않았다. 물을 주고 물로 씻기며 스스로 산뜻해지는 기분. 하지만 연결하는 것 번거로워서라도 그다지 자주 사용할 것 같진 않는구나(결론적으로 이번 아내의 선물도 100% 마음에 들진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