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 결혼기념일이라고 둘째 딸이 꽃다발을 안겼다. 아이쿠. 사랑스러운 노란색 소국이었다. 꽃잎도 어찌나 작고 귀엽던지. 집 뒤 담벼락에서 꺽어서 돈도 안 들었다며 아빠, 나 잘 했지? 한다. 나는 뭘 하나? 옳다커니. 나도 담벼락으로 나가 가위로 줄기를 잘라 공짜 꽃다발을 만들어왔다. 제법 이쁘다. 아내에게 선물이라며 안기니 환멸스럽다는 표정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왠지 좋아요 수가 폭발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들어 꽃다발을 화병에 꽂고 제일 구도가 좋은 공간을 골라 사진을 찍었다.
두 시간 후 아내가 자기도 인스타를 했다며 한 번 보란다. 아내는 나보다 팔로워 숫자도 많고 글도 재미있게 잘 쓴다. 기대감에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그녀의 인스타 계정을 열었다.
"남편이 결혼기념일 선물로 뒷담벼락에 흐드러진 꽃을 잘라 흐드러지게 꽂아 주길래 실소했을 뿐인데 내 표정에서 환멸을 읽었다고. 무엇이든 과장 잘 해요-남편과 벌써 14주년. 무더운 날 아무렇지 않게 ‘적도에 있는 거 같아’ 라고 중얼거리는 과장의 달인. 그 피를 유이와 유지중에서 유지가 물려 받았는데( 유지가 엄마 나 머리카락 자르니까 대머리가 된 기분이야 라고 했을 때 유지에게서 남편을 보았다 ) 다행히 애교가득한 강아지 심성도 함께 물려 받았다. 유지의 꽃 선물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모두 떠난 후 보니 남편의 꽃 선물은 음식물 쓰레기 봉투와 참치캔과도 조화를 이루네. 그런데도 남편은 굳이 식탁으로 옮겨 각을 잡아 사진을 찍는다. ㅎㅎㅎ 남편의 보여주기식 삶, 보면서 사는 것도 내 기쁨이다. 얼마전에 크게 싸우고 우리 그냥 지금까지 잘 살아온 부부였다고 생각하자고 했던 내 말이 생각나 웃음이 난다. 잘 살자. ?#환멸과환희
아내의 인스타는 난리가 났고, 나도 덩달아 많이 웃었다. 협소주택에서는 오늘도 이렇게 작은 추억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