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집에 산다. 3층 집이라지만 1층 7평, 2층 5평, 3층 8평 정도인(설계도면과 달라져 정확한 평수는 모르겠다) 그저 작은 집이다. 나도 큰 집을 좋아한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뻥 뚫리는 그 시원한 개방감을 좋아하지 않을 이몇일까. 하지만 작은 집에 살아보니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만큼의 아늑함도 자주 느낀다.
1 작은 공간, 색다른 경험
막상 지반 공사를 하면서부터 층별 공간 구성은 완전히 뒤틀어졌다. 원래는 2층 전면을 벽장으로 사용하려 했다. 철마다 옷을 고르고 정리하는 수고로움을 반복하다 보니 사계절 옷이 한눈에 쫙 펼쳐진 옷장이 그렇게 갖고 싶었다. 그런데 2층이 옆집 지붕과 맞닿아 있어 가용 면적이 확 줄어들었다. 욕실도 그만큼 줄어 세면대는 복도 끝으로 뺄 수밖에 없었다. 1층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세면대와 수납장이 보인다. 이게 무슨 대피소 같은 풍경인가? 세면대가 복도에 있다니,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다며 아내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세면대는 밖으로 나왔다.
붙박이장은 1층으로 내려갔다. 덕분에 피아노는 놓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다. 그곳에서 책 읽고 음악 들으며 아름답게 살겠다, 는 계획도 어긋났다.
복도에서 세면대를 이용하는 것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예상외로 훨씬 좋았다. 세면대 너머로는 창문이 있고 그 창문을 열면 대학교와 면한 뒷담 벼락이 보인다. 백설기를 큼직큼직하게 잘라 쌓아 놓은 듯한 모습. 석벽 사이사이로는 담쟁이와 산국화가 흐드러진다. 웃옷을 벗고 듬성듬성 부케처럼 풍성한 산국화와 담쟁이를 보며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다 보면 상쾌한 기분이 된다. 어느새 가을의 정점. 담쟁이 잎은 울긋불긋 빨간색으로 변하는 중이다. 자연을 보고 느끼며 아침을 시작한다는 건 감사하고 근사한 일. 욕실이 넓어 세면대가 실내로 들어갔다면 이런 의외의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면대가 주는 의외의 즐거움 덕분에 1층 옷장도 기대를 하는 중이다. 옹색한 공간이 될 확률도 높지만 나름의 멋과 발견이 있을 거라 기대한다. 집이 생각보다 많이 작아지며 좌절하는 나에게 아내가 그랬었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고 두 평 정도는 인테리어로 충분히 커버할 수 있어!’ 그 자신만만함에 괜한 반감이 들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2 한옥이 가장 좋다,라고 생각했던 어리석음
5년을 한옥에서 살았다. 그곳에서의 시간을 사랑했다. 낭만은 추위에 있다고 했던가. 오래된 나무문 사이로 바람이 휑휑 들어오다 보니 겨울이면 난로를 집안에 들였고 그 위에서 보리차를 끓였다. 가래떡도 구웠다. 전기장판에 누워 그렇게 구운 노릇한 떡을 씹고 있으면 '겨울이라 좋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날의 낭만은 말해 뭐하랴. 빗물받이 함석판은 그 자체로 훌륭한 스피커. 토독토독 명랑하게 공명하는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아 좋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지금의 협소 주택으로 이사를 오면서도 나는 언젠가 한옥, 한옥이 최고, 하는 말을 달고 살았다.
막상 이사를 하고 나니 그런 애정이 얼마나 얕은 것이었는지 깨닫는다. 이 작은 집이 한옥과는 또 다른 낭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불 두 채도 깔기 힘들 만큼 작은 안방에는 야마하에서 나온 소형 오디오와 오래된 조명 하나가 있다. 소형 조명인데 방이 워낙 작아 전원 스위치를 올리면 어스름한 빛이 방 전체를 감싼다. 빛이 특정 한 곳을 연극 무대의 조명처럼 비추는 것도 아름답지만 공간 전체를 하나의 무드로 만들어내는 것도 남다른 감흥을 준다. 방 전체가 아련한 빛이 유입되는 동굴의 초입 같달까. 그런 분위기에서 창밖을 보고 있으면 좀 더 차분한 분위기에서 시공간의 정적을 음미할 수 있다. 하늘의 달도 새롭게 보인다.
단독주택은 내가 원하는 쪽으로 창문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앞집, 옆집과 면해도 어느 한쪽은 반드시 좋은 풍경이 펼쳐질 확률이 높다. 그렇게 내 것으로 만든 풍경은 집이 작고 불편하다는 생각을 크게 희석시키며 두고두고 소중한 존재가 된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것 중 한 가지가 옥상을 만들지 않은 것이다. 하자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는 말에 너무 쉽게 포기를 해 버렸다.
방수 점검 차 한번씩 옥상에 올라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소장님이 안방 구석에 네모난 가벽을 만들고 그 위로 옥상과 연결되는 유리 뚜껑을 달아 주셨다. 옥상에 갈 일이 있으면 그 공간에 의자를 갖다 놓고 유리 뚜껑을 열면 된다. 좋은 아이디어네, 생각했는데 이 구조 역시 의외의 즐거움을 준다. 유리판이다 보니 빗소리가 실로폰 화음처럼 경쾌하게 들린다. 나처럼 가는 귀가 먹은 사람도 바로 알아챌 만큼 명징한 소리. 그곳만 유독 소리가 선명해 어느 날은 왼쪽, 오른쪽 밸런스가 안 맞는 이어폰을 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빗소리는 언제나 옳다.
3 자연스럽게 소소해지는 일상
소소한 일상, 소소한 삶, 소소한 즐거움. 소소가 이렇게 환영받는 단어가 된 적은 없었던 듯하다. 소확행의 다른 말이 소소한 행복이지 않은가. 모두가 가지려 애쓰는 이 ‘작은’ 가치가 작은 집에 살면 저절로 해결된다. 정원을 예로 들어볼까. 어른 걸음으로 네 발자국 걸으면 끝나는 곳. 처음에는 나무며, 꽃이며 많이 심을 계획이었지만 그럴 만한 공간이 없다. 이사를 온 후 겨우 조팝나무 5그루를 심었을 뿐이다. 출근하지 않는 날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그 아이들을 들여다본다.
암반 위에 지은 집. 돌밭이라 그런지 영 뿌리를 못 내리고 시름시름 앓고 있다. 개중에 어떤 아이는 줄기 아래쪽으로 여리고 연한 연둣빛 싹을 한 아름 피워냈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 잠시 환한 마음이 된다. 만지기만 하면 다 망가뜨리는, 스스로도 인정하는 똥 손이지만 정원사 흉내를 내며 마른 가지를 조심조심 잘라낸다. 담벼락에서 말라 떨어진 담쟁이 잎도 빗자루도 쓸어 하수구에 못 들어가게 스테인리스 대야에 담아 놓는다.
날이 좋은 날에는 그 작은 정원에 캠핑 의자 하나 갖다 놓고 책을 읽는다. 잠시 졸 때도 있는데 늘 그늘이 지는 까닭에 오래는 못 잔다. 하지만 무릎 덮개를 갖고 와 잠깐의 망중한은 충분히 보낼 수 있다.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하늘 색깔도 감상한다. 소소한 시간이지만 큰 만족이다.
PS. 작은 집에 사는 즐거움만 나열했지만 아쉬움, 그걸 넘어선 괴로움과 불편함도 분명 있다. 하지만 즐거움이 크면 불편함은 자주 부각되지 않고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이 되다가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는 상태가 되는 것 같다. 다음에는 그 '어둠'에 대해서도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