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한옥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플레인베이글 Apr 11. 2019

한옥이 아이들 정서에 미치는 영향

요렇게 기억했으면 하는 아빠의 바람


한옥으로의 이사를 결심한 건 약 6년 전이다. 전세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나니 택배며, 주차며 고민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반대쪽에서는 그만큼 기대되는 것도 많았다. 친구들을 불러 마당에서 삼겹살을 굽고, 우두커니 비구경을 하고, 애들한테도 좋은 기억을 심어줄 수 있을 것 같고. 긴 여행을 떠나기 전날처럼 설레였다. 단독주택과 관련한 신문 기사 한 줄 한 줄도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을 암시하는 계시처럼 읽혔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한국 아이들의 60% 이상이 아파트에 산다. 그런 주거문화가 아이들의 창의력에 도움이 될까? 창의력과 남다른 정서를 키워주기 위해서는 자연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렇게 이사를 했고, 한옥에 산다고 하면 애가 있는 사람들은 '애들한테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촉촉한 눈망울로 이야기한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많은 이유리 팀장도 그랬다. 그런가?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큰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막내는 초등학교 1학년인데 집에 있을 때는 핸드폰과 아이패드만 쳐다보고 있다. 너무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그래 왔어서 속이 터지지도 않는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애들아 산책가자, 마당에 나와 놀자 해도 "응 엄마아빠 다녀와~" 쿨하게 거절한다. 내심 좋아라 하는 티도 팍팍 난다. 엄마아빠 잔소리 안 듣고 2~3시간 마음 편히 유튜브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절로 웃음이 나는 거다.


다행히 한옥살이를 아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첫째 아이는 신학기가 되면 한번씩 친구들을 데리고 와 한옥투어를 한다. 한옥에 산다고 하면 친구들도 "궁금하다, 한 번 초대해 줘" 하는 눈다. 한 번은 연차를 내고 집에 쉬는 날 한옥 탐방대가 갑자기 들이닥쳤는데 한바탕 기분 좋은 소동이 일어나는 듯 했다. "우리 집, 지하실도 있다. 내려가보자" "우와, 우와" "여기가 내방이야. 동생이랑 같이 써" "음..." "화장실은 밖에 있어. 여기가 화장실이야" "우와 완전 좋다." 옥상 밑에 가건물처럼 옹색하게 자리잡은 비좁은 화장실이 뭐가 좋다는 건지 애들은 애들이구나 싶었다. 친구들의 열띤 반응에 가이드로 나선 큰 아이의 표정에는 자부심이 피어나는 듯 했다. 첫째 아이와 모든 면에서 다른 둘째 아이는 어떻게 집을 소개하고 그 친구들은 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한데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해 집에 데리고 올 친구가 없다. 유치원 때는 '삼총사'의 대원들인 해밀이와 선우가 몇 번 놀러왔는데 긴 마당비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가더니 하늘 위로 붕붕 떠다니는 마법사 키키 놀이를 하며 자지러졌다.     


어릴 때 한옥에 살았다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한옥에 대한 기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너무 좋아서 언젠가 한 번 더 한옥에 살고 싶다는 쪽과 너무 춥고 고생스러워서 한옥 하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게 된다는 쪽. 양쪽 다 어떤 마음인지 너무도 알겠다. 이런 얘기를 하다보면 지금의 한옥이 전세라서 오히려 특별한 시간을 선물받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집이면 '아이고,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거?' 아득해지지만 2년, 다시 2년으로 시간이 한정돼 있으면 어지간한 일은 소동이나 추억으로 귀결된다. 천장에서 비가 새 적금을 다 털어 구매한 제스퍼 모리슨의 디셈버 체어에 얼룩이 생기고, 보일러가 고장나 찬 방에서 이불이란 이불은 다 꺼내 덮고 잤던 적도 있지만 당시에도 우리 반응은 "어쩔 수 없지 뭐. 잊자 잊어" 혹은 "재미있다" 였다. 아이들도 덩달아 좋아했던 것 같다.  


한옥살이가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지, 어떤 기억으로 남을 지 전혜 예상할 수 없지만 기대하는 바는 있다. 감성과 오감이 좀 더 열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 한옥은 대부분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이다. 그 문을 드르륵 열 때의 소리, 나무문 특유의 따뜻함이 있다. 창문 바깥쪽으로는 나무로 틀을 덧대고 창호문을 만드는데 한지 위로 빛이 일렁일 때는 햇살 가득한 물속을 바라볼 때처럼 것처럼 환한 마음이 된다. 해가 이동하면서 강렬한 빛을 드리우고, 비가 올때는 짙은 어둠을 만들어내는 것도 마음에 다양한 층위의 음영을 새기지 않을까 싶다. 겨울에는 많이 춥고, 여름에는 많이 덥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듯 하다. 그렇게 계절마다의 캐릭터가 있고, 그렇게 계절은 자연스럽게 바톤 터치를 한다는 걸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만으로 좋지 싶은 거다. 아티스트 서도호를 인터뷰 한 적이 있는데 어릴 적 한옥에서 살며 보고 느꼈던 것들이 지금껏 기억에 생생하다고 했다. 한지를 통과해 마루에 드리우던 빛, 저녁이면 느껴지던 나무의 그림자, 그리고 빗소리, 바람소리, 낙엽 뒹그는 소리.


우리 아이들은 평범하고 그리 섬세하지도 않다. 예술적 감성도 없는 듯 하고. 그러니 서도호 만큼의 '아름다운' 기억을 기대할 순 없을 거다. 다만,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 그 속에 우리 집과 식구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런 기억으로 "어릴 때 한옥에 살았는데 너무 좋았어요. 언젠가 다시 살아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면 더할 나위 없고. 지금 모양새로 보건데 애들에게 큰 재산을 남겨줄 순 없을 것 같고 집에 대한 행복한 추억이라도 만들어줬구나 확인하는 순간들이 찾아오면 할아버지가 된 나는 은근히 뿌듯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벚꽃에 취하고 한옥에 반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