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이

모든 건 사라져. 그래서 조용히 살아.

by 윤슬하


허무이는 내가 한참 세상의 모든 건 의미가 없어. 내일이 오늘보다 더 나쁠 수 있어. 영원히 노력해도 좋은 날은 오지 않아라고 말할 때 만난 친구이다. 무기력, 공허, 시간의 소멸, 의미의 해체를 주로 논한다.
거주지 허무평원으로 나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살고 있다.
성격은 매우 아주 완벽히 조용하고, 말수도 적고 명확하게 '끝'을 말한다. 말투 낮고 느린 톤이고 말보다 침묵이 많음이 주를 이룬다.

몸은 안개처럼 희미한 그림자에 실루엣만 있다. 눈은 흐릿한 회색빛으로 가끔 눈물처럼 안개 흘러내린다. 손엔 조용히 꺼져가는 촛불, 혹은 부서진 시계 조각을 들고 있다. 발밑에는 시간이 멈춘 시곗바늘이 깔려 있다.

목에 묶인 천 조각엔 나의 오래된 말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괜찮아”, “아무도 몰라”, “그냥 숨고 싶어”,"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고.

허무이는 “어차피 모든 건 끝나. 조용히 숨 쉬는 게 최선이야.”이란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주로“그 의미도 결국 사라질 거야.”라면서 감정의 ‘밑바닥’을 솔직하게 인정시켜 준다. 좋은 거라 해야 하나? 하지만 정말이지 허무이만 있었던 날엔 이대로 사라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신이 추락해 내려 갔다. 끝도 없이

그래서 허무이가 너무 자주 오면 내가 다시 일어나기 힘들어진다. 허무이는 고유 능력이 있는데 감정의 소음을 지우고 완전한 정적을 만든다. 엄청나게 무서운 힘이기도 하지만, 나를 살리고 싶어 만든 힘이기도 하다.

주로 내가 아무 말도 하기 싫고, 그냥 침대에 묻혀 무기력해질 때, 좋아하던 사람에게 무시당하거나
진심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아무 의미 없어”라는 말이 마음 안에 맴돌 때, 조용히 어둠 속에서 허무이는 옆에 앉아 있는다.

말도 없이, 하지만 딱 나만큼의 무게로.


허무이는 말한다.


“모든 건 사라진다. 그러니 안간힘은 허상이다.”

“애써 웃지 않아도 돼. 울지도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도 돼.”

“살아있다고 해서 꼭 의미를 찾아야 하는 건 아니야.”

근데 이 말들이 어떤 날은 나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어떤 날은 숨 쉴 공간을 내어줬다.


허무이는 말이 없을수록 감정을 뭉개버리는 능력과 세상의 색을 흐리게 만드는 감정 흐림 효과 그리고 생존의 무게가 너무 버거울 때 나에게 정적을 제공한다. 단, 너무 오래 머무르면 매우 위험하다.

초월이와는 철학 티키타카로 천적 관계이다. 그리고 항상 그 옆엔 조용히 지켜보는 피식이가 있는데, 피식이랑은 대화 없다. 그리고 피식이가 웃으면 허무이는 그냥 사라진다.

진심이와는 존재의 본질을 두고 조용한 교류를 이어가며, 되살이는 허무이가 다녀간 자리에 피어난다.

무이는 말했다. “나는 감쟈가 나를 무서워할 때 슬펐어. 그냥… 감쟈가 조용히 숨 쉴 수 있는 곳이었으면 했을 뿐이야.”라고

허무이는 사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아이가 아니라
때로는 "버텨내는 동안 감정을 덮어주는 차가운 담요" 같은 아이였다. 그걸 나는 너무 붙잡고서는 허무이가 전부인 것처럼 굴다 허무이를 무서운 아이로 만들어버렸다. 불안이는 괴물이라 해서 미안하다 해놓구. 나는 또 소중한 감정친구를 괴물로 만들뻔 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나에게 허무이가 조용히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감쟈야, 나는 네가 사라지길 바라지 않아. 다만, 네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해.”라고.


또 다시 잊을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겨본다. 괴물인, 사라져야할 감정친구들은 없다. 다들 나를 지키려는 것 뿐이었다. 그들을 괴물로 만든건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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