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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Oct 24. 2021

오랜 고통을 바라보다

조각난 기억 3

  머릿 속이 온통 안개로 자욱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과거를 생각하려 할때면 항상 그렇습니다.  

   

  ‘항상’이라는 단어가 정확한 걸까요. 아닙니다. 저는 항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건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았을 때 ‘그런 경향이 있었다는 생각’이 든 것일 뿐입니다. 그럼 ‘과거’라는 단어는 정확히 언제를 지칭하는걸까요. 머릿속이 안개가 자욱하다는 것은 정확하게 어떤 상태를 묘사하려 하는 것일까요.    

 

  생각한다는 것은 언어를 통해 현상을, 세계를 재구성하려는 것입니다. 과거를 생각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에서 무언가 불만족스러운 상태의 원인을 ‘기억의 재구성’이라는 과정을 통해 해석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죠. 그럼 저는 무엇이 불만족스러운걸까요. 저는 어디에서 불안을 느끼는것일까요. 안개가 낀 것 같다는 느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안개가 낀 것 같다는 느낌’은 실제 느낌이 아닙니다. 무언가 뒤엉켜있고 정리되지 않은채로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두지 못하는, 걸림이 있습니다. 실타래가 엉켜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냥 있지 못하고 풀어보려 애쓰지만 도무지 풀리지 않으리라는 절망감을 함께 느끼는 그런 상태와 유사할까요. 안개가 낀 것 같다 라는 문장이 떠오르고 곧이어 뿌옇게 덮여있는 과거의 이미지, 기억의 안개가 피어오릅니다. 반사적으로 단어가 떠오르고 이미지가 거기에 뒤따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과거’와 ‘안개’, 아마 어느 시점에서 반복된 사고작용이 이런 이미지의 연결통로를 만들었겠죠.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이전에는 ‘과거’라는 단어가 ‘상처’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상처’라는 단어는 명확한 이미지가 아니라 회로를 끊는 듯한, 더이상의 사고의 연상작용을 막게하는 암막같은 느낌입니다. 그 암막 이미지의 뒤에는 형언할 수 없이 불쾌한 감각이 있습니다. 검고 축축하고 어디로도 흐르지 않은채 혼탁하게 괴여있는 감정의 소용돌이. 아, 이런 묘사로는 닿을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기억을 떠올려보지요.


  일고여덟살 즈음이려나. 밀양 유천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흐르는 물살에 떠밀려 내려가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 어떤 감정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정말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때 감정 그대로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감정은 그 물결과 함께 흘러가버렸죠.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것은 떠내려가는 나를 기슭의 내가 내려다보고있는 듯한 비현실적이고 불확실한 이미지이고 거기에 달라붙는 것은 떠올리는 순간 드는 감정입니다. 어떤 때는 ‘어어... 더 갔으면 큰일이었지, 근데 그 때 부모님은 어디 계셨지’하다가 불안과 초조함이 올라오고 어떤 때는 ‘결국 나는 무사히 올라왔었지’ 하는 안도감이 올라옵니다. 결국 과거를 떠올리며 느끼는 감정은 ‘지금’의 상태에 따라 바뀌죠.


  삶이 문제없이 흘러가고 있고 ‘내’가 확실하게 ‘현재’를 붙잡고 있는 동안은 ‘과거의 기억’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안온한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구석진 방문 뒤에 그저 숨어있을 뿐입니다. 아니 숨어있다기 보다는 차라리 그 순간, 과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제상황이 닥치고 감정이 일렁이면 어김없이 ‘과거의 그림자’가 고속도로처럼 잘 닦여있는 기억의 통로를 질주해 다가옵니다.     


  ‘여길 봐, 이 문을 열고 나를 봐. 여기에 네가 찾던 게 있어. 바로 네가 여기에 있다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 두려움과 자기혐오감, 그리고 무기력함. 머릿속 안개는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걷히지 않고, 불현듯 찾아오는 고통은 오래도록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보이지도 않는 상처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간만의 휴일 오후, 옆에서 블록을 가지고 잘 놀던 네 살 된 딸아이가 갑자기 손가락을 내게 들이밀며 “여기 아야~했어”하고 울상을 지어 보입니다. 놀라서 “어디, 어디?”하고 채근하며 살펴보니 며칠 전에 살짝 베인 상처를 가리켜보이며 “여기가 아파요”랍니다. “이제 안아프잖아”하고 핀잔이 섞인 말투로 놀리듯 이야기하니 못내 억울한지 손가락을 몇번이고 펴보입니다. 그리곤 양미간을 잔뜩 찌푸린채 “여기 이렇게 아야~했어”하며 배우 못지않은 연기를 선보이더니, 그래도 아빠 반응이 영 시큰둥하자 제 엄마를 찾아 부산하게 뛰어나갑니다. 한쪽 팔꿈치를 휘휘 저으며 뒤뚱뛰뚱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웃음을 참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어딘가에 부딪혀 넘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잠시 불안한 정적이 흐르고, 곧 아이는 둑터지듯 울음을 터트립니다. 다행히도 아기엄마가 금새 아기를 안아 달더군요. “괜찮아? 어디가 아팠어, 어디 보자, 우리 아기.” 엄마 품에서 서럽게 울던 아이는 그 말에 훌쩍거리며 무릎과 손가락을 번갈아가며 가리켜보입니다. “여기, 여기”하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채로 엄마를 간절히 바라보는 아이를 보며, 제 고통을 다시 바라봅니다.  

   

  제 오래된 고통, 아무리 도망쳐도 불쑥불쑥 나타나 자기를 가리켜보이는 끈질긴 망령을, 눈 맞추고 이야기할 수 없어 시선을 멍하니 돌린채로 웅얼거리곤 하는 오랜 상처를 꺼내어 봅니다.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이성복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을     

그 살에 묻히는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가녀린 풀잎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토록 피해다녔던 치욕이 뻑뻑한,

뻑뻑한 사랑이었음을     

소리없이 돌아온 부끄러운 이들의 손을 잡고

맞대인 이마에서 이는 따스한 불,     

오래 고통받는 이여

네 가슴의 얼마간을

나는 덥힐 수 있으리라     


   

  지난 고통의 순간을 막상 들추어 바라보면 제멋대로 굳어버린 상처딱지들처럼 작고 하잘 것 없습니다. 하지만 “지는 해의 힘없는 햇빛 한 가닥에도 날카로운 풀잎이 땅에 처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소리없는 괴로움을 제 입술로 핥아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오래 고통받아온 당신도 알고, 저도 알고 있습니다.


  고통의 전조에 대한 극도의 예민함, 체념이 섞인 반항과 자기 합리화, 결국 찾아오는 고통을 그저 견뎌내는 무기력함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줄이 끊어지듯 사고가 정지되고 짙은 피로감만이 남는 치욕스러운 순간을 왜 시인은 뻑뻑한 사랑이라 말하는 걸까요. 이 오랜 상처가 새겨진 가슴을 도대체 어떻게 덥힐 수 있을까요.     


  지금은 그저 저는, 그리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대고 있습니다.

  치욕을 태우는 불길이 그 사이에서 타오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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