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이 따스합니다. 한낮의 태양빛은 눈을 감아도 눈아래에서 그 자국을 한참동안 남기죠. 점심을 지나 졸음이 슬그머니 찾아오는 오후면 늘 쉬는시간에 자리하는 자그마한 회전의자를 벗어나 창고 앞 볕 잘드는 곳으로 나섭니다. 따가운 햇살을 마주하고서 눈을 감고 있으면 기분좋은 노곤함과 충만감이 눈꺼풀을 지나 깊은 안쪽까지 스며듭니다.
하지만 빛만이 오래남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둠도 그렇죠. 눈을 감아도 지워지지 않는 어두운 방이 있습니다.
해가 어스름 내려앉는 저녁일때도 있습니다. 물한방울 샐틈 없이 어둠이 꽉꽉 채워진 그런 밤일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이는 뒷모습은 항상 검습니다. 잔뜩 굳은채로 문을 막고선 버티고 있는 크고 검은 등. 그 너머로 다른 그림자 하나는 떨리다 이내 침묵으로 엎어집니다. 문틈으로 지켜보고 있는 저는 다시 어쩔 줄 모르고 서있습니다. 문지방 아래로 검은 안개가 퍼져나와 온 몸이 잠겨듭니다.
'저기 꾸물꾸물 스며나온다. 눈을 감지않아도, 내가 지금 앉아있는 카페 앞 음식점 문 틈으로.'
안개는 이제 두렵지 않습니다. 단지 바라보고 있으면 몸이 물먹은 솜처럼 잠겨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다른 무언가를 빨리 해야한다는 조바심이 올라옵니다. 뭘해야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해야합니다. 그런데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하면 저건 분명 나를 볼테지. 그럼 다음 타겟은 내가 되는거야. 무얼 하든 그게 중요한게 아니야. 가만히 있어도 안돼. 부자연스런 침묵은 반항기가득한 시위로 해석될 수 있으니까. 최대한 자극하지 않을, 자연스러운 행동을 해야해. 그게 뭐지, 뭘 해야하지.’
‘그러려면 최대한 저것에 감정을 이입해야해. 내게 저것이 다가오지 않게 하려면, 왜 저런 적의를 뿜어대는지 최대한 이해하는 척, 저 정체모를 것이랑 동류인 척 해야해.’
아, 구차하고 비루한 삶이여. ‘나’라는 것은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 믿음인가요. 저는 그 어두운 방 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 그 문 뒤에 안전하게 숨어있기 위해 얼마나 쉽게 제 입장이라는 것을 버리고 또 속이며 살아왔던가요. 항상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는 버릇은 그 방을 벗어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해야하는 상황. 아무리 생각해봐도 정의라고,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되씹어 가며 우리의 정의라, 우리를 위한 사랑이라 자신을 납득시켜야하는 몸부림.
안개가 어느새 발밑에 자욱하니 이 이야기는 그만해야겠네요. 그런데 당신의 어두운 방은 어느 문 뒤에 숨어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