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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Oct 24. 2021

닫혀있는 문

조각난 기억 1

  어떤 기억들은 문 뒤에 숨어있습니다. 저는 힘껏 문을 닫고, 그 기억들을 거기 남겨두고, 한참을 헐떡이며 달려왔습니다.     


  인생이 기나긴 달리기라면 저는 어디에선가 코스를 잘못 들어버린 것일까요, 그럼 제가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대체 어디로 이어져있는걸까요? 숨이 갑자기 턱까지 차오릅니다. 앞에 있는 문들을 닥치는대로 열어보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첫 문을 열자마자 닫혀있던 기억들이, 몰아칩니다.   

 

  국민학교를 갓 들어갔을 무렵일까요. 으스스한 어느 섬나라 요정들 이야기를 읽다가 컴컴한 아파트 계단을 달음박질로 내려가던 밤이 떠오릅니다. 청자였더가 거북선이었던가. 담배 심부름이라면 이골이 나있었지만 귀여움과는 몇만광년쯤 떨어진 기괴한 요정이 벌이는 등골서늘한 이야기를 막 봐버린 다음의 아이에게 아파트 4층 계단은 아주, 아주 길고 구불구불한 미로였습니다.     


  '괜찮아, 계단을 두개씩 뛰어 내려가면서 위층에 켜둔 불이 꺼지기 전에 재빨리 아래층 전등 스위치를 누르면 되는거야.'   

  

  하지만 비장하게 문을 나서 집 초인종 옆 스위치를 처음 켜는 순간부터 온 신경이 곤두섭니다. 늦은밤 심부름의 댓가인 거스름돈 오백원으로 손에 넣을 달콤한 보상들, 이를테면 50원짜리 뽑기에서 한번도 뽑지 못했던 카리스마 넘치는 용모양 설탕과자며, 달고나 쪽자의 탄내섞인 달달고소한 냄새를 애써 떠올리며 용기를 끌어모아 가슴을 크게 부풀려봅니다. 숨 한번 크게 내쉬고,


  ‘가자!’     


  가슴 가득 끌어모았던 용기는 딱 반 층계만에 사라졌습니다. 층계 커브에서 촛불마냥 볼록 솟은 계단 손잡이를 잡고 원심력을 이용해 돌자마자 다음 두 계단을 내려선다는게 둘 반 정도의 보폭이었나, 휘청 하고는 통제 불능. 발이 엇나가자 손도 함께 허우적거리고, 분명 뒤에서 무언가 쫓아오고 있습니다.


 '스위치를 타이밍 찾으며 따박따박 누르고 있을 여유따윈 없다. 무조건 뛰는거다.' 


  그러면서도 계단을 돌때마다 손은 필사적으로 벽을 더듬어댔고, 어느 층에선 허우적거리는 손끝에 스위치가 걸려 불이 켜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숨 좀 돌리고 용기를 다시 내서 내려갔냐고요? 그럴리가. 오히려 그 창백한 흰빛에 더 놀라며 떠밀리듯 내달렸습니다. 누가봤다면 왔다갔다 번쩍거리는 불빛속을 반쯤 미친 놈처럼 고꾸라지듯 뛰어내려오는 자그마한 아이 모습에 실소를 터트렸겠죠. 하지만 저는 문 밖 그 어두운 복도에서, 실은 그보다 밝은 문 안에서도 항상, 떨고 있을 여유조차 없이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제 뒤로 문은 닫혀있고, 전 그날밤처럼 정체도 모르는 두려움에 쫓기며, 길고 구불거리는 어둠 속을 소리없이 절규하며 내달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빛이 비치면 비치는대로 '왜 내게 이런 빛이?"하며 더욱 떠밀리듯이.     


  이제 오래 닫혀있던 문을 엽니다. 그 긴 어둠과 찰나의 빛이 교차하던 순간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전 무엇을 만날게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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