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조그마한 다락방,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찬 책장 앞 커다란 나무 책상 위로 책들이 어지러히 널려있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볼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내 어디가 좋았어”라는 질문처럼 대답하기 난감한 질문이 있을까요? 무심한 듯 툭 한마디 던져놓고는 온 몸을 바짝 세워서 듣고 있는 이에게 “그냥 다 좋지 뭐”하는 심드렁한 답을 내놓았다가는 분명 편치않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겁니다. 하지만 답을 찾는 시간이 길어져도 안됩니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의 매력 포인트를 잘 집어내는게 핵심인거죠. 좋아하는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니 마찬가지의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이야기를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핵심을 잡아내고, 이야기를 맛깔나게 이어나가는데는 영 소질이 없어서 말이죠.
한여름밤 무서운 이야기의 추억, 여러분은 있으신가요? 한창 떠돌던 학교괴담을 기가 막히게 엮어내던 친구, 또는 베게맡에서 배를 쓰다듬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귀신 이야기를 속삭이시던 할머니 목소리가 떠오르신다구요? 무서운 이야기는 누가 하느냐가 어쩌면 재미에 가장 큰 역할을 할 테죠. 제 여름밤 이야기꾼은 누나였습니다. 한여름 제삿날, 한창 뛰어놀다 뜀박질에 시들해진 사촌들이 하나 둘 모여앉아 ‘누나, 무서운 이야기 해줘, 전에 그 이야기 재밌었는데’ 하며 채근을 하곤 했습니다. 그럼 조금 전까지 하다 만 이야기처럼 천연덕스럽게 ‘피부가 흘러내리는 소녀’의 처절한 모험담을 앉은 자리에서 누에실 뽑듯 자아내던 누이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저는 답답이였지요. 꼭 해야 할 말도 어찌 시작해야 할 지 몰라서 머뭇거리기 일쑤인데다, 재미있게 말하는 요령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습니다. 영화나 책을 보고 누군가에게 이야기할라치면 ‘음’만 열 두번 되뇌이다가 “됐고, 밥이나 먹으러 가자”는 상대의 말로 끝나거나, “암튼 참 재밌었지.”리는 하나마나한 독백으로 끝나곤 했죠.
하지만 이젠 서툴게나마 책에서 제가 느꼈던, 차마 말이 되지 못했던 그 감정들을 찬찬히 당신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퇴근길의 공기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그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것처럼, 책을 덮고도 눈 아래 남아 사라지지 않는 그 풍경들을 머뭇거리고 더듬거리더라도 들려드리고 싶네요.
아, 당신이 괜찮으시다면 제 다락방의 책들을 소개하기 전에 조각나있는 제 유년기의 기억들을 더듬어 이야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개인적이고 어두운 이야기들이라 망설여지지만 책에 대한 제 사랑은 그 굳게 닫힌 문 뒤, 어두운 방 한 구석에서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괜찮아”라는 단어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어두워도 괜찮아.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몰라도 괜찮아.
모두가 다니는 큰 길이 나오지 않더라도,
끝없이 이어진 미로같은 골목길을 헤매도,
괜찮아, 다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