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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Oct 24. 2021

도망가자

선우정아, "도망가자"를 듣고

  “도망가자”


  “어디로? 누구랑?”


  “지금 나랑, 가깝지만 먼 저 너머로”     


  책이 방문  주저앉아있는 손을 끌며 이야기했습니다. 저를 끄는  손을 잡고 용도가 모호한 여닫이 장이 가운데 떡하니 자리잡고있는 오래된 나무 책장 앞에 섭니다. 오른쪽 제일  칸에는 등장인물 이름 외우기가 도무지 힘들었던 ‘대망스무권이 묵직하게 들어차있습니다. 가운데 여닫이장 옆칸에는 용그림이 멋지게 그려져있던 길천영치(요시카와 에이지라고 읽는지는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세로쓰기 삼국지가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다 정착해있고,  옆으로 천도성 36, 지살성 72명의 얼굴이 뒷표지에 썸네일로 빼곡히 들어차있는, 한권이 이가 빠진 수호지가 나란히 꽃혀있습니다.


  가운데 칸에는 타임지에서 나온 동물들의 표정이 담긴, 동물의 왕국풍 칼라화보집이 가장 위. 가끔은 보물상자였고, 이제는 두루마리 휴지보관함이 된 여닫이장 아래로 지구 속과 우주와 바닷속을 시끌벅적 떠들어대며 탐험하던 과학만화시리즈. 그 왼쪽, 가장 손이 잘 닿는 두 칸은 꼭 끌어앉고 잠들던 민화집과 동화집들. 그리고 사자왕 형제의 모험(지금 찾아보니 창비아동문고네요.) 그 위로 꼬마 니콜라, 알퐁스 도데와 오 헨리, 모파상의 단편집, 미하엘 엔데의 짐 크노프와 모모, 에리히 캐스트너의 하늘을 날으는 교실, 그리고 뽀르뚜가와 제제,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 조그마하던 책장이 점점 커지네요. 이윤기의 뮈토스가 축약판 일리아드 오딧세이아와 나란히 놓여있었고,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와 유리알 유희도 분명 손잘닿는 곳에 뒀었죠. 소설 동의보감도 책장 귀퉁이 어딘가 오래 박혀있었습니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분명 여러번 읽었는데 그게 제 책장에서 꺼낸것인지 도서관의 모퉁이에서 꺼낸것인지 확실치 않네요.


  그렇게 저는 그 책장 속으로,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책들의 손까지 모두 붙잡고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방문에서 가장 떨어진 곳, 붙박이 이불장과 책장이 만나는 방 가장 구석 모서리에 구겨져서, 방문을 열면 가장 마지막에 발견되는 그 자리에 배깔고 누워서, 읊조리는 이야기 속으로 깊이, 더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저 어두운 방에서 어쩔 수 없이 가깝지만,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낭기열라 다음의 낭길리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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