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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Aug 22. 2021

지금 여기, 내가 전화를 거는 곳

- 레이먼드 카버, 내가 전화를 거는 곳 을 읽고

 제가 처음 소개해드릴 이야기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 『대성당』속 한 단편입니다. 『대성당』에 실린 열두편의 단편 중 제가 특히 좋아하는 이야기는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과 “대성당”입니다만,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내가 전화를 거는 곳”입니다.

(이하 글의 녹색 부분은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김연수 역), 문학사상, 2014 에서 인용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J.P.와 나는 프랭크 마틴이 운영하는 술 끊기 시설의 앞 포치에 있다.  

   

 포치는 전원 주택이나 산장의 현관을 떠올리시면 비슷할까요. 튀어나온 지붕 아래 현관 앞으로 의자 두 개가 놓여있습니다. 그 의자에 덩치 큰 젊은 사내 둘이 몸을 깊숙이 묻고 난간에 발을 걸친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 만난지 이제 이틀 된, 낮선 이들간의 대화는 “춥긴 하지만 대단히 춥지는 않은” 날씨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어느새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주로 이야기 하는 사람은 굴뚝청소부라는 흔치 않은 직업을 가진 J.P.입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사고에서부터 마치 드라마같은 아내와의 첫만남까지 흥미진진한 J.P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계속 이야기를 재촉합니다.     


“계속 이야기해, J.P.? 그래서?”


“그래서?”. “지금 멈추지 마, J.P.”     


이렇게 말이죠.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느 날 말발굽 던지기 놀이를 시작하게 된 사연을 늘어놓는다고 해도 내가 귀를 기울였을 것만은 분명했다.


 이처럼 “나”에게 J.P.의 이야기는 단순한 흥밋거리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알콜중독 치료소에 온 사람의 인생여정이 “그렇게 그들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같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리는 없겠죠. 아이도 둘이 생기고 집까지 사게 된, 원하던 모든 것을 가져서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던 J.P.의 이야기는 "하지만 무슨 까닭에서인지 – 낸들 알겠는가,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라고 “내”가 자조섞인 어투로 한탄하는, 중독의 어두운 면으로 접어듭니다. 맥주가 진토닉이 되고, 집으로 퇴근하는 대신 술집으로 퇴근하게 되죠. 점점 심해지는 술버릇 때문에 J.P.와 그의 아내 록시는 처절한 싸움을 겪게 됩니다. 그렇게 상대를 파괴하는데 그치지 않고 J.P.는 자신을 파괴하기 직전까지 갑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을 원래 궤도로 되돌려놓을 방법을 찾기 위해 이곳에 찾아오게 됩니다. “나”는 두 번째인 프랭크 마틴의 치료센터에 말이죠.     


 네, 이제야 “나”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두 번째로 왔다는 언급에서 짐작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나”의 상황은 J.P.보다 더 녹록치 않습니다. 제대로 나오지도 않지만 간간히 회상으로 떠올리는 “나”의 이야기들은 한 호흡으로 이어지는 J.P의 인생 이야기에 비하면 시설에서의 일상, J.P.의 이야기 사이사이에 뒤죽박죽으로 흩어져 있어서 하나의 이야기로 모으기 쉽지 않습니다. 아내의 이야기가 나오나 싶으면 여자친구 이야기가 나오다가 갑자기 시건방진 여자친구 아들에게로 넘어가 버리죠. 굴뚝청소부라는 J.P.의 직업은 여러 번 나오지만 “나”는 직업이 무엇인지 언급조차 않습니다. 여자친구와 함께 있다가 두 번째로 프랭크 마틴의 시설에 오게 된 계기를 회상하며 여자친구의 버르장머리없는 아들 욕을 두서없이 내뱉지만, 아내와의 사이에 아이가 있었는지, 어떻게 헤어지게 되었는지 같은, 정작 “나”에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렇게 굳이 단편 본문 속에서 말하지 않은 이야기를 제멋대로 상상해볼까 합니다. 아마도 “나”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가기 힘들어진 상태까지 온 것이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 가치인지조차 이미 다 잃어버린 상태, 타인의 상처, 타인의 삶을 재밋거리삼아 들을 수는 있지만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인정하기 두려워서 돌아보기조차 힘든 상태, 발작으로 쓰러져있는 시설 입소자의 모습에 자신을 겹쳐보며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라고 되뇌이는, 바닥에 한없이 가까이 가라앉아있는 상태. “내”가 서있는 곳은 그리도 황량한 곳이리라고 저는 제멋대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제멋대로 생각을 조금 더 밀고나가봐도 괜찮을까요? 그 바닥의 바닥에서 “나”는 J.P.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J.P.는 머리를 흔들며, 입을 꽉 다물다 턱을 끌어당기며, 의자에 축 늘어진 채 정말 조용하게 앉아있다가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습니다. 말발굽 던지기 놀이 운운하던 “나”는 J.P.의 이야기를 채근하며 따라가다가 어느 순간 산산히 흩어져 있던 자신의 이야기 조각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아내와 센터에 처음 왔던 날, “나”를 괴롭히던 의문을, 내미는 도움을 받고 싶지만 받고 싶지 않기도 한 복잡한 마음을 슬며시 나에게, 그리고 어쩌면 제 글을 읽고 책장을 뒤적일지도 모르는 바로 당신에게 풀어다 놓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맨 처음에는 아내가 나를 여기에 데려왔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는 함께 제대로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 중략 ...

하지만 나로서는 그들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내 마음의 일부는 도움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지만 아내에 대한 짧은 회상은 대뜸 두 번째 입소일에 자신을 데려다 준 여자친구 이야기로 넘어가 버립니다. 어떤 기억들은 견고한 벽이 굳게 가로막고 서서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이야기는 조각난 채로 끝나는 것일까요?    

 

 J.P.와 이야기를 나눈 다음날 아침 – 바로 새해 전날 -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서로 고함치며 끝났던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지만, 처리해야 할 물건이 있다는 핑계로 자신을 애써 납득시키려 하며 전화를 걸지요. 하지만 응답은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속으로 웅얼거립니다.   

  

괜찮다. 괜찮지 않다고 해도 내가 뭘 어쩌겠는가?     


그날 저녁, “나”는 다시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습니다.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할까 하다가 할 말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둡니다.     


어쨌든 그녀와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가 괜찮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혹시 뭔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면 나는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더 이상 상처받는 것이 두렵습니다. 누군가의 짐을 나누어드는 것이 버겁습니다. J.P.의 이야기가 “나”를 움직였지만 응답없는 아내와의 관계,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여자친구의 건강문제는 무력감을 느끼게 합니다. 결국 여자친구에게는 전화 걸기를 포기해버리죠.


 그리고 새해 아침, J.P.의 아내 록시가 남편과 함께 새해를 맞으러 시설로 찾아옵니다. 포치 앞 계단에서 J.P.가 록시에게 “나”를 소개하죠. 그 자리에서 "별 거 아닌" 일이 잠시 벌어집니다. “나”는 그 일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멍청한 짓이라는 걸 알지만, 어쨌든 나는 그 짓을 한다.     


“나”는 별 거 아닌 그 일 이후 앉아있던 계단에서 불현듯 어떤 기억을 선명하게 떠올립니다. 견고하게 접근을 거부하던 아내와의 기억. 어찌보면 기억을 불러온 록시와의 해프닝이 오히려 사건이라 할 정도로 정말 별것 아닌 기억입니다만 그 기억을 떠올리는 “나”의 감각은 생생하고 충만합니다. 그만의 성소를 다시 찾아낸 것일까요? 성소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분과 다시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그리고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아마도 오늘 오후 늦게 나는 다시 아내에게 전화해볼 것이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는지 여자친구에게 전화할 것이다.

... 중략 ...

“여보세요, 자기야?” 그녀가 전화를 받으면 그렇게 말하리라. “나야.”     


  결말에 대한 해석은 사족이 될 듯하여 더 이상 쓰지 않겠습니다. 대신 제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 볼까 합니다. 『대성당』 속 다른 단편의 제목처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일이 있습니다. 이 단편의 주인공에게 그 일이 우연히 같은 날 시설에 입소하게 된 J.P.의 이야기를 듣게 된 일이었다면, 제게는 아내의 권유로 글을 쓰게 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볍게 시작한 자신에 대한 끄적거림이 일상의 허덕임 속에서도 끊길 듯 끊기지않고 이어져 이 브런치라는 플랫폼까지 오게 되었네요. 책에 대한 이야기로는 처음 썼던 이 글을 브런치에 올리며 제가 서 있는 자리를 다시 바라봅니다.


 제가 서있는 바로 지금 이 곳, 못나고 부족한 제가 미처 소화되지 못한 책들을 부여잡고 제멋대로 끄적거리고 있는 이 곳이 바로 여러분께 “내가 전화를 거는 곳”입니다. 응답이 없을지라도, 계속 전화를 걸어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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