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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Aug 24. 2021

절망적인 고독에 닿아 울리는 낯선 위로

- 무라카미 하루키, 토니 다키타니를 읽고

          

 오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토니 다키타니”라는 이야기를 소개해드릴까합니다. 이 이야기는 40페이지 남짓의 짧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이야기 속에 제가 다루고 싶은 주제가 몇 가지나 들어있는 깊은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레이먼드 카버가 “내가 전화를 거는 곳”에서 다루었던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중독에 대한 이야기, 하루키가 예루살렘상 수상연설에서도 언급했던, 전쟁이 부모 세대에 남긴 죽음의 그림자 등, 모두 삶의 본질에 깊이 맞닿아있는 주제들이죠. 그 주제들 중에서도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고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하 녹색부분은 무라카미 하루키, 렉싱턴의 유령(임홍빈 역), 문학사상, 2006을 인용했습니다.)      


1. 인생의 전제조건, 고독     


토니 다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토니 다키타니가 틀림없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야기의 전반부는 왜 토니 다키타니가 고독을 인생의 전제조건처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관계 맺는 법을 부모를 통해 가장 먼저 배우게 됩니다. 토니의 경우, 아버지인 다카타니 세이사부로는 삶을 한없이 가볍게 사는 사람입니다. 재즈트롬본 연주자인 그는 타고난 단순하고 낙천적인 성향에 전쟁에서 겪은 삶의 무상함이 더해져, 삶을 부유하듯 살아가죠. 무수히 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하지만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공연장을 떠돕니다. 그리고 토니의 어머니는... 토니가 태어난지 3일만에 죽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아버지의 부재. 그렇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이 고독에 익숙해진 토니는 고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삶을 버텨갑니다. 예술적 재능이 있던 토니는 추상적인 그림을 거부하고 기계류의 세밀화만을 묵묵히 그려나가지요. 고독에 익숙해져있는 그에게, 당시 젊은이들의 절실한 과제였던 권위나 체제에 대한 대항, 또는 미술대학 교수와 동기들의 평가 따위는 이해되지 않는 가치였습니다. 지극히 정밀하고 사실적인 그림만이 그를 살아있다는 감각에 연결시켜 줍니다. 고독에 깊이 가라앉아 있는 이에게 삶의 가치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은 이들에게 다른 가치들이 하잘 것 없이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2. 고독이라는 감옥을 깨닫다.     


 이런 토니의 고독한 삶에 “머나먼 세계를 향해 날아오르는 새가 특별한 바람을 몸에 걸친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리고 우아하게 옷을 입은 여자가 뛰어듭니다. 이 한 문장으로 토니의 삶이 흔들리는게 느껴지네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토니 다키타니는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사람을 사정없이 흔듭니다. 당연했던 것들이 더이상 당연하지 않게 됩니다. 이전까지 아무런 의문없이 영위해왔던 세계가 사실은 한없이 불완전하고 흠투성이의 세계였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르지요. 토니가 서른일곱해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고독이 그녀를 만나고서는 “돌연 알 수 없는 무거운 압력으로 그를 짓누르”게 됩니다.     


고독이란 감옥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 중략 ...

그는 그녀를 만나 그런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제까지 자신이 살아온 인생이 얼마나 고독했고, 얼마나 많은 것을 잃으며 살아왔는지를, 그리고 그녀가 그 사실을 자기에게 깨닫게 해주었다는 사실을.     


 토니와 그녀는 결혼합니다. 토니 다키타니의 고독의 시기는 그렇게 막을 내리지요. 토니의 삶은 그 전과 어떻게 달라진 것일까요? 아내와 함께 아버지 세이사부로의 연주를 듣는 토니의 독백 장면이 이렇게 그려집니다.  

   

그 음악 속의 무언가가 그의 숨을 답답하게 하고, 기분나쁘게 했다. 그 음악은 토니 다키타니가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예전 음악과는 약간 다르게 느껴졌다.

...중략...

그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는 무대 위로 올라가 아버지의 팔을 잡고, 도대체 뭐가 달라진 거에요, 하고 물어보고 싶었다.     


 저는 이 장면을 오래도록 곱씹어 보았습니다. 세이사부로의 음악은 무엇이 변한 것일까요? 여기서 저는, 변한건 아버지의 연주가 아니라 토니라고 제멋대로 생각해보았습니다. 토니는 결혼 후 석달간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다시 고독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자기가 잃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그녀와의 관계를 통해 깨달은 것이죠. 하지만 세이사부로는 아내를 잃고도 이전과 똑같이 공연장을 떠도는 삶을 계속합니다. 아들인 토니는 고독 속에 방치해두고 말입니다.     


 토니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고독에 익숙해진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죠. 하지만 사랑에 빠지고 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고 난 후 아버지의 음악은 그에게 다르게 들립니다. 아내를 잃고도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이전까지의 삶의 방식을 고수한 세이사부로의 삶이 연주에 녹아있겠죠. 두려움을 알아버린 토니는 그 음악이 결여한 것이 무엇인지 예민하게 느끼지 않았을까요? 죽음에 대한 인식의 부재, 예술과 기교의 결정적 차이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토니는 빠져나왔지만 세이사부로는 감옥인지도 모른채 그대로 갇혀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독을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일상은 이어지고 음악은 연주됩니다. 하지만 깨닫고 난 이후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음악이 그에게 공기와 같이 당연하던 고독의 기억을 불러온 것인지, 토니는 숨이 답답하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 불쾌감의 근원은 어머니의 죽음을 외면하고 피하기만 한 아버지에 대한 분노일지도 모르겠네요. 토니는 이렇게 묻고 싶었던 건지도 모릅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아버지의 무엇을 바꿔놓았나요?”     


3. 영원한 상실, 낯선 위로     


 토니에게 완벽한 아내에게도 자신만의 결핍이 있습니다. 그 결핍으로 인해, 그녀는 방 가득히 옷과 신발만 남겨두고 바람처럼 다시 떠나갑니다. 우리는 이렇듯 갑작스럽고도 영원한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할 수 없지만 이미 벌어진 영원한 상실을 대체 어떻게 견뎌나갈 수 있을까요?     


 토니는 “내가 전화를 거는 곳”의 “나”처럼 엉뚱한 일을 벌입니다. 아내의 체형을 닮은 여자에게 아내가 남긴 옷을 제복으로 입고 일하는 아르바이트를 제안하는 것이죠. 여자는 이해할 수 없지만 일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정말 옷이 맞는지 입어보기로 하지요. 커다란 방을 가득 메운 아름다운 옷들 속에서 그녀는 갑자기 눈물을 흘립니다.     


그녀는 그 옷들을 하나하나 손에 들고 바라보았다. 손끝으로 더듬어보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몇백 벌이나 되는 아름다운 옷들이 그곳에 즐비하게 진열돼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혀왔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눈물은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눈물을 그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죽은 여자가 남긴 옷을 몸에 걸친 채, 소리 없이 꼼짝 않고 흐느껴 울었다.     


 그녀의 눈물을 토니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녀가 돌아간 후 그는 곧 마음을 바꿔 전화로 여자의 고용을 취소하고, 옷들은 모두 처분해 버립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이죠.   

  

이미 모두 끝난 일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이제 와서 무슨 짓을 한다 해도, 모든 것은 완전히 끝나버린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완전히 단절시킵니다. 박목월이 “하관”이란 시에서 절절히 고백했듯이 떠난 이의 목소리는 들려오는데 아무리 전신으로 답해도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합니다. 무엇을 해도 그 단절을 메울 수 없지요. 따스한 체온, 가늘고 높은 목소리, 미소짓고 찌푸리던 표정들, 작은 습관들, 말로 차마 다 표현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은 이제 더이상 닿지 않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절망은 눈물조차 잊게 만듭니다. 눈물을 흘릴 수도 없습니다. 그저 얼어버린 마음만,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는 마음만 있을 뿐. 토니는 다시 고독에 잠기게 됩니다. 선명하던 기억조차 희미한 그림자로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그 방 안에서 아내가 남기고 간 옷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낯선 여자를 떠올렸다.  

   

 그 여자는 울었습니다. 전혀 모르는 이의 옷을 입고, 소리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옷들의 주인이 입고 맞이했을 모든 일상이, 그녀에게 가능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슬퍼했습니다.


 그리고 토니는, 그녀의 눈물로 위로받았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고, 위로라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지만 그 눈물은 토니의 마음에 깊숙히 새겨져 그의 깊은 상실감을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제 감정을 여러분께 잘 전달하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가 읽었던 이 위로를, 절망적인 고독에 닿아서 울리던 이 낯선 위로를 여러분께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고독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단절시키는 것보다 어쩌면 더 먼저 우리는 이미 고독합니다. 토니가 아내에게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부분이 있었던 것처럼 아무리 가까운 이도 어떤 면에서는 낯선 타인일 수 밖에 없지요. 그렇지만 그 고독 속에서도 우리는 이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러다 알 수 없는 어느 지점에서 각자의 이야기가 닿아 공명하죠.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그리고 상대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 닿은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삶을 버티는 힘이 되고 위로가 되어 오래도록 남아있습니다.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의 울음을 토니가 잊어버릴 수 없듯이, 그리고 제가 10년도 더 전에 읽었던 토니 다키타니라는 고독한 남자의 이야기를 잊을 수 없어 이렇게 여러분께 이야기하듯이 말이죠.     


 그럼 오늘의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쳐야 되겠네요. 다음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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