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신화
- 대니얼 월리스, 빅 피쉬 를 읽고
나는 불현듯, 그리고 아주 단순하게, 한때 소년이었던, 어린애였던, 그리고 젊은 청년이었던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봤다. 내 청춘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도 한때 청년이었던 것을, 나는 한 번도 아버지를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이미지들-아버지의 현재와 과거-은 모두 하나로 합쳐졌다. 그러자 순간, 아버지는 젊으면서도 늙은, 죽어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새로 태어나고 있는 아주 기괴한 존재로 변했다.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이하 녹색부분은 대니얼 월리스, 빅 피쉬(장영희 역), 동아시아, 2019 에서 인용했습니다.)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책상 앞에 앉으니 어젯밤 아이의 소리로 채워져있던 방이 낯선 정적으로 가득합니다. 멍하니 앉아있다보니 출근시간이 되어가는지 엘레베이터의 “우웅~”하는 소리가 들려오네요. 삶에는 드라마처럼 멋진 OST가 들려오진 않지만 귀기울여보면 의외로 여러 리듬이 들려옵니다. 카페 벽을 여기저기 부딪히다가 귀에 닿은 웅성거림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사랑노래보다 크게 가슴을 울리기도 하고 비내음섞인 세찬 바람소리가 세포하나하나를 통과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요. 오늘은 맥동치는 기계음을 배경음악 삼아 서점에서 겪었던 당혹스러웠던 경험을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올 1월이었나요, 벌써 꽤나 시간이 지났네요. 피곤을 핑계로 방구석만 덥히던 휴일을 벗어나 오래간만에 대형서점을 찾았습니다. 이리저리 둘러보다 보니 한창 상영되고 있는 뮤지컬의 원작들을 모아놓은 코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같은 고전들 사이에 생소한 뮤지컬 배우들의 사인이 담긴 띠지를 두른 노란 표지의 책이 놓여있더군요. 노란 꽃이 가득한 표지를 보고있자니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노란 수선화 가득한 정원 한가운데, 양손을 주머니 속에 꽂아넣은 채 연인을 바라보며 서있는 한 남자의 모습.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영화의 한 장면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원작이 있었던 거야?’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책을 집어들때만 해도 저는 그 날이 제게 그런 식으로 기억될 줄 몰랐습니다. 눈물로도 모자라 희극지왕의 주성치처럼 콧물까지 줄줄 매달고선 두 손으로 어정쩡하게 얼굴을 가린채 화장실로 달려가는 당혹스런 경험을 몇 번씩이나 반복하는 날이 될 줄 말이죠.
무슨 책이길래 마흔을 한참 넘긴 아저씨가 붐비는 대형서점 한가운데서 눈물콧물을 쏟았느냐구요? 노란 수선화가 가득한 그 책은, 대니얼 윌리스의 『빅 피쉬』 였습니다. 팀 버튼의 동명의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빅 피쉬란 제목으로 책내용을 짐작하기 힘드실테지요. 낚시 이야기 아니냐구요? 낚시 이야기를 하니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가 떠오르네요. 빅 피쉬도 어떻게 보면 “흐르는 강물처럼”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가장 가까운 이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이야기이죠.
빅 피쉬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평범한 일상 이야기는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들이 들려주는 비범한 아버지의 신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곰과 호랑이가 마늘과 쑥을 먹으면 사람이 된다는 그런 이야기,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고, 미궁에서 괴물이 배회하는 바로 그런 신화말입니다. 아들은 늙은 아버지를 바라보며 “나의 아버지는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 당신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는게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네요.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가 있지만 그들 모두가 아버지 노릇을 썩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으니까요. 물론 제 아버지도 완벽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어린 저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죠. 산처럼 커다랗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아버지는, 점점 키가 줄면서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아버지가 되어 갔습니다. 한 번 화를 내실때면 온 집이 들썩거리던 목소리도 점점 작아져 전화기 너머 잠겨가는 희미한 목소리가 되었죠. 그리고 지금은 그 희미한 목소리마저 기억 너머로 사라지고 있습니다. 네, 이미 오래전에 제 아버지의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휴대폰 액정 위로 새로운 이야기들이 엄청난 속도로 생성되고 있는 4차산업혁명의 시대는 예전에 끝난 이야기를 찬찬히 되새기는걸 허용할만큼 여유롭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끈질깁니다. 이미 끝났다고 방심하고 있는 순간 불현듯 찾아와 가슴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신화가 아직까지 읽히는 것도 그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니 당신께 아버지의 신화를 끝끝내 들이대더라도 너그러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빅 피쉬, 에드워드 블룸의 이야기는 다른 고대의 신화들처럼 불완전한 인간의 이야기이거든요. 겨우 백일을 못참고 동굴을 뛰쳐나가는 호랑이나, 숱한 시련을 이겨내고도 오해로 인해 목숨을 잃는 헤라클레스 이야기처럼 말이죠. 지극히 인간적인 신화, 사람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어져내려오면서 다양하게 변주된 불멸의 존재의 좌충우돌 모험담이 이 책에서는 어떻게 그려지고 어떻게 끝날지 조금은 궁금해지셨나요?
이쯤으로 변죽은 그만 울리고 책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이 책은 크게 두 갈래의 이야기가 각각 진행됩니다. 하나는 에드워드 블룸의 비범한 탄생부터 시작되는 ‘아버지의 신화’입니다. ‘거인과 맞서싸운 이야기’ 같은 젊은 아버지의 허풍기 가득한 무용담들이 맛깔나게 그려지지요. 그리고 다른 한 갈래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이 부분에서 아들인 윌리엄 블룸은 환상을 솜씨좋게 버무려가며 풀어내던 신화와는 전혀 결이 다른 건조한 문체로 병상에 누운 늙은 아버지와의 대화를 꼼꼼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는 마지막 파트이자 이 책의 제목인 “큰 물고기”에서 마침내 하나의 이야기로 흘러들어 마무리됩니다.
젋은 아버지의 신화 같은 모험담과 손님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이야기가 교차하는 이 책에서 제 마음을 끌어당긴 건 매번 “그 일은 이렇게 일어난다”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영화에서는 팀 버튼만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기괴하고도 에너지 넘치는 젊은 블룸의 모험담이 기억에 남았었지요. 그렇지만 원작에서는 오히려 죽음을 기다리는 아버지가 누워있는 손님방에서 벌어지는 총 네 장면의 이야기를 오래도록 넘기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를 어떻게든 이해하려 애쓰는 아들과 자신이 살아온대로 아들을 대할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저를 사정없이 흔들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보내야했던 제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시간이었기에 더더욱 쉽게 넘기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 아래로는 제게 말을 걸어오던 문장들과 그 물음에 책장을 펼쳐둔채 멍하니 답을 찾던 제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은 글들입니다.
“에드워드 블룸, 에드워드 블룸이 죽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했을걸.”
정말 감히 누가 그런 생각을 했겠는가?
그랬습니다. 정말 감히 누가 자신의 아버지가 죽으리라고 생각 했을까요. 일요일 저녁, 의무처럼 의례 이어지던 어머니와의 긴 통화의 끝에서야 잠시 듣던 그 목소리, “네 엄마 걱정은 하지말고, 집은 아버지한테 맡겨두고, 누나와 둘이서 잘 지내거라.”라는 단 세문장으로 받자마자 끝나던 무심한 듯 정겹던 그 목소리를 기억을 더듬어서야 겨우 떠올리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요.
“네가 날 필요로 할 때 난 함께 있어주지 않았어. 그렇지?”
“네”
그러셨지요. 함께 있어주지 않으셨지요. 매일 집으로 돌아와도 어쩐지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셨지요. 당신의 아픔 속에서 어찌 자신을 꺼낼 줄 몰라 깊이 가라앉아 있으셨지요. 제가 알 수 없는 당신의 신화 속에서, 당신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계셨던 건가요.
"크고 작은 이야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게 다 쌓이는 거죠. 일생을 거쳐 그게 다 쌓인다고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이곳에 있는 겁니다, 윌리엄. 우리는 모두 아버님의 일부이지요. 아버님이 우리의 일부인 것처럼 말입니다. 아직 이해를 못 하시겠지요? 그렇지요?"
이 부분은 <아버지의 꿈>이라는 소제목 아래의 글입니다. 에드워드 블룸의 꿈 속에서 사람들이 그의 병세를 듣고 집 앞으로 모여들고, 그 중 리더인 듯한 사람이 윌리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저는 사람들이 몰려든 제 이야기 속 장소를 불러냅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이지요.
장례식날, 제 안에 무엇이 사라져갔는지 미처 헤아리기도 전에 제가 모르던 아버지의 일부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대인관계에 서툰 아들이라 썰렁하리라 여겼던 장례식장을 이제 갓 스물이 넘은 듯한 학생들부터 어엿한 교육자가 된 나이 지긋한 이들까지 아버지의 제자들이 내내 찾아와주었습니다. 제가 갓난쟁이 일 적에 아버지께 배웠던 분이 전화를 하기도 하셨지요. 나지막하게 한참을 아버지와의 추억을 이야기하며 위로를 건네던 목소리를 저는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습니다. 저녁 내내 식장 구석에서 친구들을 맞던 학생 하나는 밤이 깊어지자 무턱대고 영정사진 앞에서 몇 번이고 큰절을 하더군요. 그 이들에게 아버지가 어떤 이야기로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이들은 확실히 아버지의 일부분이었겠지요.
“나는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진정 사람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니?”
제게 묻지도 않으셨지만 저는 아직도 모릅니다. 하지만 윌리엄처럼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면 아버지의 어깨를 살짝 치며 말하고 싶습니다.
“그대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뒷 부분은 차마 쓰기 쑥쓰러우니 직접 책에서 확인해보시지요. 저는 이런 쑥쓰러운 선서조차 실행하고 싶어도 이미 늦어버렸네요. 당신께는 그렇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자, 이제는 책 이야기를 빙자한 제 개인적인 추억 이야기도 끝을 맺어야 할 때가 온 듯 하네요. 윌리엄 블룸은 “어떻게 끝이 나는가”라는 소제목으로 글을 끝맺을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아버지를 죽음으로 이끈 병에 대해 그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도대체 이 세상 여기저기 다 있다는 게 신 말고 또 뭐가 있는지, 그리고 왜 그들을 그렇게 당혹스럽고 슬프게 만들었는지 생각했다.
그리고는 그 챕터의 마지막을 이렇게 마무리하지요.
그래서 이 실제 벌어진 사건을 정말로 재미있는, 두고두고 이야기하며 웃게 될 에피소드로 바꾸기를 기다렸다. 그의 손을 잡고 기다렸다.
나는 오랫동안 기다렸다.
저는 여기서 이야기가 끝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도 수술실 앞에서 오랫동안 기다려보았으니까요. 그리고 제 아버지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났었지요.
하지만 윌리엄은 계속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렇게 말이지요.
그래서 마침내 그 일은 이렇게 일어났다. 전에 이 이야기를 들은 적 있으면 내게 이미 들었다고 말해달라.
그렇게 윌리엄 블룸은 마침내 자신이 아버지의 마지막 이야기를 만들어가지요. 전에 어디에선가 들은 듯한 ‘불멸의 이야기’를 자신과 아버지의 이야기로 만들어갑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이야기일지라도 그는 써내려갑니다. 당신이 윌리엄의 이야기를 믿으실지 저는 모르겠네요. 저도 여태껏 고개를 저어왔고 제 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미 끝났다고 기억 저편으로 밀어두었으니 말이죠.
하지만 지금 제 아버지는 “지붕 위의 아버지”, “미소 짓는, 신비로운, 신화와 같은, 그리고 알 수 없는 나의 아버지” 에드워드 블룸의 이야기와 함께 제 안에서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잊었다고, 기억나지 않는다고 고개를 저어왔지만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힘이 있습니다.
윌 블룸(will bloom)의 큰 물고기 이야기가 제 안에서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시 피워냈듯이 제 두서없는 이야기가 당신이 잊고 있던, 하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던 유장한 이야기의 한 줄기가 되어 함께 흘러갔으면 합니다. 그럼 좋은 밤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