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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우 Aug 27. 2021

뒤늦게 찾아온, 단 두 문장의 의미

- 테드 창,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 을 읽고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요? 오늘의 책을 소개하기 전에 괜찮으시다면 책에 대한 잡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혹시 문유석 판사의 『쾌락독서』 라는 책을 읽어보셨나요? 제가 책에 대한 글을 써보려 생각할 즈음 서점에서 제목만 보고 집어들었던 그 책은 제 의욕을 마구 꺽어버렸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제가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재미있게 작가가 써놓았기 때문이었죠. 이 책의 핵심은 ‘독서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 재미가 가장 중요한 이유이자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핵심이 무엇보다 잘 표현되어있는 책이기도 해서 참고할 부분을 찾아 대충 펴보았다가 글은 쓰지도 못하고 어느새 끝까지 또 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쾌락독서라는 책에서 작가가 평생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으로 무슨 책을 꼽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판사이자 미스 함무라비라는 드라마의 작가이기도 한 이야기꾼 문유석 작가가 고백한 책은 바로 김용의 무협소설이었습니다. 저도 중학교시절 친구와 김용의 이야기 주인공들 중 누가 최강자인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던 기억이 있기에 무척 반갑더군요.(저는 우직한 곽정과 영리한 황용 커플을 가장 애정했습니다.) 누가 궁금해할까 모르겠지만 제게도 같은 질문을 던져본다면 저는 결국 J.R.R.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꼽을 듯 합니다. 언어학자인 톨킨이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가며 평생을 걸쳐 다듬어온 실마릴리온 이라는 장대한 신화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을 가장 의외의 인물들 – 자그마한 호빗과 기괴한 괴물인 골룸 – 로 풀어나가는 그 유려하고도 장엄한 이야기 속에서 저는 한동안 헤어나오지 못했습니다.     


 무협소설의 거장 김용이 다양한 인간군상의 희로애락으로, 반지의 제왕의 작가인 톨킨이 선과 악의 대립을 그린 장대한 서사시로 저를 사로잡았다면, 다른 방식으로 저를 사로잡은 이야기꾼이 있습니다. 바로 제가 오늘 소개하고자하는 이야기인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의 작가인 테드 창입니다.     


 테드 창은 장편이라고는 단 한편도 낸 적이 없고 평균 2년에 한 편 정도 중단편을 낸 것이 전부이지만 SF계의 노벨상이라는 휴고 상과 네뷸러 상을 여러 번 수상한 “현역 최고의 SF작가”라는 찬사가 따라붙는 작가입니다.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 실린 작품집 『숨』 은,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텍트” 라는 영화의 원작이 실린 첫 작품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이후 무려 17년만에 나온 작가의 두번째 작품집입니다.


 하지만 『숨』 이 우리나라에 출간되기 한참 전인 2008년 오월에 저는 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 짧고도 기묘한 이야기가 실렸던 지면은 “판타스틱” 이라는 장르문학을 다루는 월간지였습니다. 당시 흔치않던 장르 전문 잡지인데다 얼음과 불의 노래로 유명한 조지 R.R.마틴의 알려지지 않은 초기단편을 소개하고 인터뷰를 싣는다거나, 요재지이풍의 기묘한 이야기를 그리던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만화를 특집으로 다루는 등 내용도 충실해서 매월 나오는 날이 다가오면 서점을 기웃거렸습니다. 한참 들락거리던, 홍대에 위치한 만화도매상 매대에 깔리자마자 잽싸게 집어들고 반지하방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선명하네요. 하지만 그 당시 장르문학에 대한 푸대접을 반영하듯 1년 반 후 계간지로 슬그머니 바뀌더니 곧 폐간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산 마지막 호가 2009년 여름이었죠. 이후 몇 번의 이사를 하며 숱한 책을 버려왔지만 이 잡지들은 지금도 베란다 구석 박스에 고이 담겨 있습니다. 처분할까 고민도 했지만 유시진의 “파문”이란 만화와 테드 창의 이 이야기,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이 실려있는 유일한 인쇄물이라 차마 버리지 못했네요. 그럼 제가 12년을 이고지고 다니던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일지, 제 기억 속에서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이야기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실까요?     


1. 연금술사의 문 앞에 서다.     


 셰에라자드의 속삭이는 듯한 숨결이 느껴지는 중세 아랍의 중심지, 바그다드의 거리가 눈앞에 펼쳐져있습니다. 화려함을 뽑내는 금속공예품들이 줄줄이 늘어서있는 금속 세공사의 거리, 그 중에서도 가장 목이 좋은 곳에 자리잡은 커다란 가게가 보이시나요? 거래처에 보낼 선물을 사러 온 목적도 까맣게 잊은채 온갖 진귀한 기구와 장식품들을 넋을 놓고 보고있자니 주인인 듯한 노인이 말을 걸어옵니다. 명료하면서도 따스함이 담긴 그의 목소리를 따라가다보니 어느새 발걸음은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화려한 전시공간을 지나, 온갖 장치들이 늘어선 공방도 지나쳐서 더 깊숙한 방 한 가운데, 문이 놓여있습니다. 칠흑처럼 검지만 매끄럽게 연마된 육중한 문이네요. 처음으로 외부인에게 공개된 이 문의 이름은, '세월의 문' 입니다.   

  

 이 연금술사의 문의 정체는, 바로 타임머신 입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여 미래나 과거로 갈 수 있는 문이지요. 보고도 믿을 수 없지만 그 문은 바로 눈 앞에 육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혼란스럽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 없습니다. 왜 노인은 이 문을 보여주는 걸까요?

    

 연금술사는 세월의 문 앞에서 혼란에 빠져있는 상인에게 세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다른 곳에서 만들어진 또다른 세월의 문을 이용한 사람들의 이야기죠. 세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것을 알아냅니다. 우리가 비슷한 상황에서도 다른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서 자기만의 배움을 얻듯이 말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상인을 유혹하고 두번째 이야기는 상인에게 위험을 경고하는 듯 합니다. 그리고 세번째 이야기는 상인의 마음을 흔듭니다. 누구나 바라마지않는 부와 명예도 유혹이라 부를만큼 충분히 현명하고,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잣대로 쉽게 판단하지 않을만큼 신중한 상인의 마음이 어떤 부분에서 흔들렸을까요?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인도 그러하죠. 그는 20년을 몸을 서서히 태우는 지옥불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상처가 깊은 죄책감으로 남아 그를 괴롭혔습니다. 최선을 다해 고결하게 살려고 노력했지만 죄의식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어난 일을 설명하기 위해 애씁니다. 하지만 그 설명은 번번히 실패합니다. 죄책감이 들고 후회가 남습니다. 그래도 하루는 시작되고 우리는 살아나가죠. 그러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문 앞에 서게 됩니다. 거래처에 줄 선물을 사러 우연히 들른 가게에서 상인이 오랫동안 그만을 기다려온 문을 마침내 만난 것처럼, 오랫동안 우리를 기다려온 이야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우리를 사막으로 이끕니다.   

  

2. 시간을 거슬러 사막으로,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다.     


 연금술사에게 세가지 이야기를 들은 상인은 카이로에 있는 또다른 시간의 문으로 향합니다. 바그다드에서 카이로를 향하는 대상과 함께 출발한 상인은 예순번의 새벽을 맞은 후 순조롭게 카이로에 도착합니다. 그 곳에서 상인은 또다른 세월의 문을 통과하여 드디어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과거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지금의 자신이 해야할 역할이 있으리라는 희망에 기대어, 바그다드로 가는 대상과 함께 사막을 건너는 긴 여정에 다시 나서게됩니다.     


 여러분은 사막을 가 본적 있으신가요? 이렇게 묻는 저도 막상 사막을 가본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가득 붐비는 주말 카페에 앉아있는 지금도 마음 한켠에는 서걱거리는 모래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일이 밀려들 월요일을 생각하면 여유롭던 마음도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낙타처럼 삭막해집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과거의 기억들도 저를 누르고 있습니다. 일상에 묻혀있던 상처들이 문득 떠올라 분노로 숨이 막히고,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선택을 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멍하니 시선을 들어 벽을 노려보기도 합니다. 제 발 밑이 모두 모래입니다. 단단하게만 보이던 길이 모래로 무너져 내립니다. 같이 걷던 사람들, 누구보다 소중한 이들조차 미처 이별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홀연히 떠나버립니다. 헤드폰 틈으로 소음이 윙윙거리며 밀려들고 얼음잔을 가득 채운 아이스 커피로도 도저히 갈증이 풀리지 않습니다.     


 일상 속에서 사막을 만나게 되는 사람이 비단 저 뿐만 아니겠죠. 가만히 멈춰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여러분께도 모래바람 소리가 들려올지 모르겠네요. 우리는 이 사막을 어떻게 건너야 할까요? 상인은 이 사막을 어떻게 건너갔을까요?     


 20년을 속죄와 회개로 살아온 상인은 알라가 주신 기회라 믿고 과거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절실함으로 여행에 나섭니다. 하지만 오는내내 평안했던 사막은 올 때와는 달리 가장 절실한 순간에는 그에게 쉽사리 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날씨는 변덕을 부리고 질병이 창궐하죠. 그리고 모래폭풍이 불어옵니다. 예정된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상인은 결사적인 행동에 나섭니다. 일행을 설득하고 설득이 통하지않자 말도 안되는 가격에 낙타를 사서 홀로 길을 나서지요.   

  

 그리고, 그는 실패합니다. 우리가 그러하듯, 아무리 절실하게 원하고 결사적인 용기를 내어보아도, 그 모든 노력이 성과없는 헛수고가 되어버립니다. 마음을 바짝바짝 죄어오는 절망 속에서도 그저 대상과 함께 걸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무력감이 밀려들지요. 상인은 자신의 절망과 무력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든 장미 이파리가 하나씩 떨어지듯 제 희망은 날이 갈수록 이울어갔습니다.     


 네, 상인처럼 저 또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그저 하루하루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이미 예전에 떠나간 곳에 뒤늦게 도착했지요. 이미 과거는 지나갔고 소중한 것들은 사라졌습니다. 상처는 그 자리에 더 크게 입을 벌리고 있지요. 그리고 저는, 상인은, 그 자리에서, “기억과 비통함에 사로잡힌 채”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전갈을 받습니다.      


 단 두 문장의 전갈입니다.     


 과거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단지 두 문장으로 무엇이 바뀔까요? 일들은 이미 일어났고 무엇을 해도 돌이킬 수 없는데 말이죠. 우리는 각자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야기하고 싶은게 더 있습니다.    

 

3. 질문과 대답, 뒤늦게 찾아온 의미     

 

 여러분은 살아오며 받아본 질문들 중 특별히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으신가요? 저는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지금까지의 인생은 한마디로 어땠나요?”     

 

 저는 그 질문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가 이렇게 불쑥 대답했습니다.     


 “그랬어야만 했어.”     


 제 입에서 나온 대답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말을 해놓고도 무슨 의미인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그 의미를 찾다가 기억 뒤로 묻어두었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에 대한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이, 그리고 대답을 기다리는 그 질문 앞에서 무심코 튀어나온 저 대답이 제 자신을 용서하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말이죠.     


 저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과거의 무기력한 자신을 혐오했습니다. 그 무기력함은 상황이 바뀌고 시간이 흘러도 저를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도 상처는 지워지지 않더군요. 상인은 단 두 문장의 전갈을 받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저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도 저를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제 자신을 제외하고는 말이죠. 제 죄책감이 저를 짓눌러왔고 다른 식으로 행동하지 않은 자신을 비난해왔습니다. 하지만 저를 사랑하는 사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미 저를 용서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하 당신께 그러하듯이 말이죠.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위로를 줄지 결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날이 이울어가는 희망을 그저 바라보며 사막을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죠. 하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배우게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절실함이, 아무런 성과없이 스러져가는 듯 보이는 그 모든 노력이 어느 지점에서 꽃피우게 될지 모릅니다. 우연히 펼쳐든 책 한 구석에서 삶을 흔들어 다시 바라보게 만들 문장을 만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럼 다시 만날 때까지, 여러분께도 평안이 함께하시길.






참고도서      

1. 문유석, 쾌락독서, 문학동네, 2018

2. 페이퍼하우스 편집부, 월간 판타스틱 2008. 05, 페이퍼하우스, 2008

3. 테드 창, (김상훈 역), 엘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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