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우 Sep 17. 2021

개인의 성찰이 부딪치는 벽

- 애거사 크리스티, 봄에 나는 없었다를 읽고

오늘은 추리소설의 여왕,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애거사 크리스티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수염을 배배꼬는 회색 뇌세포의 명탐정, 에르퀼 푸아로를 떠올리시는 분들이 가장 많으실 듯 하네요. 또는 인디언 인형 노래가 들려오는듯한 그녀의 대표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나 여러번 영상화된 『오리엔트 특급살인』 을 떠올리시는 분도 있으시겠죠. 저는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어릴적 추리소설의 여왕이라는 명성에 이끌려 몇몇 책들을 뒤적거리다 이 책의 그 유명한 반전에 한동안 멍해져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제가 애거사 크리스티를 작가로서 열광적으로 좋아했냐고 물으신다면 그건 아니었습니다. 고풍스러운 배경과 문체, 심리묘사 중심의 서술방식과 느릿느릿 전개되는 사건 등은 제 취향과는 거리가 있어서 명성큼 재미있지는 않았다는게 한창 추리소설을 읽을 당시의 제 감상이었지요. 그렇게 잊혀져있던 이름을 다시 보게 된 것은 3~4년 전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 이라는 일본 추리소설 평론가의 평론집에서 였습니다.     


 저처럼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정작 대표작 몇권 이외에는 읽어보지 않았던 평론가는 문득 "도대체 애거사 크리스티의 어떤 작품이 어떻게 좋은 걸까"라는 의문을 느끼고는 여사의 품 전체를 파고듭니다. 그 결과물로 평생에 걸쳐 백권 가까운 책을 썼던 위대한 마스터의 모든 책들을 공략집처럼 정리한 이 평론집을 내게 되죠. 잘 알려진 작품들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함든 생소한 책들까지 여사의 모든 책을 한권한권 별점을 매기고 한줄평으로 소개한 후 – 마치 네이버 영화평 같습니다 – 본문에서는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해가며 세심하게 매력포인트를 짚어줍니다. 저도 사랑하는 작가에 대해 똑같이 써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평론집이었습니다. 읽으면서 제가 읽은 책들은 별 몇 개인지 확인하는 것도 무척 흥미로웠습니다만 무엇보다 이런 문장으로 소개하는 책들은 읽지 않고는 못버티겠더군요.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은 서점으로 달려가라"   

  

“여기에는 크리스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읽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첫번째 문장은 『다섯마리 아기 돼지』라는 책의 평이고 두번째 문장은 『끝없는 밤』의 한줄평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이 가리키는 책이 바로 『봄에 나는 없었다』입니다. 앞의 두 권의 책은 정말 흠뻑 빠져들어 읽었습니다.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작가가 왜 위대한 추리소설가인지, 사람의 어두운 면, 특히 관계에서 사소한 오해로 인해 생기는 어둠과 그것이 야기하는 파괴적인 결말을 얼마나 서늘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는지 가슴 시리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번째 책인 『봄에 나는 없었다』는 앞의 두 권과는 결이 다르더군요. 오늘 함께 나눌 이야기이기도 하죠. 그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사막에 갇히다.     


 이 이야기는 조앤 스쿠다모어 라는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불온하게 떠도는 시기에 막내딸을 만나기 위해 바그다드로 갔다가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여행지 숙소에서 우연히 그녀의 동창을 만나며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난 정말 조금도 안변했구나.’     


 마흔 여덟이라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이는 동창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그녀는 거울을 흘깃거립니다. 단정하고 세련되며 여전히 활기를 잃지 않은 자신의 모습에 그녀는 기분이 좋아집니다. 네, 조앤은 자신의 성공한 인생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녀의 남편은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변호사이며, 세 자녀들은 장성하여 번듯하게 자리 잡았습니다. 그녀는 아내로서, 엄마로서 자신의 영향력에 만족해합니다. 별 볼일 없는 남자들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며 전락해간 옛 친구는 그녀에게 불쾌감과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동정의 대상일 뿐이죠.     


 지루하지만 평온하던 조앤의 귀갓길은 폭우를 만나 요동치게 됩니다. 빗물 웅덩이들을 헤치고 기차역에 겨우 도착했더니 기차는 이미 출발했습니다. 폭우로 기차를 놓친 조앤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다음 기차를 기다리며 머물게 됩니다. 하염없이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요? 1930~40년대에 사막 한가운데서 혼자 시간을 보낼만한 일이란, 빈약한 상상력을 아무리 가동시켜봐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 취향을 저격하는 유튜브도, 실시간 스포츠 결과와 핫한 연예계 소식을 엽기적인 범죄 기사들과 함께 실어나르는 인터넷 뉴스도, 보고 또 봐도 더 봐야할 추천 드라마가 채널 구석에 남아있는 넷플릭스도 없습니다. 입을 즐겁게 할 맛집도, 지적 욕구를 채워줄 대형서점도, 출퇴근길 잠시나마 위안을 주는 라디오와 음악도 없죠.  

   

 조앤은 산책을 하고 편지를 쓰고 책을 읽습니다. 하지만, 사막의 볕은 따갑고 가도가도 비슷한 풍경만 펼쳐집니다. 편지는 쓰다보니 비슷비슷한 내용을 고만고만한 사람들에게 반복해서 늘어놓고 있을 뿐이죠. 읽을 책은 한권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혼자만의 시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그리도 바랬건만 하나하나 떠올려보는 일들은 어느것 하나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듭니다. 두고온 집안일에 집중해보지만 벽의 색조와 쿠션 종류, 방의 컨셉까지 결정하고도 15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조앤은 분명 집안을 꾸려나가는데 유능한 안주인일테죠. 하지만 사막에서 조앤이 해야할 중요한 일은 더이상 없습니다. 하루하루 쳐내야만 했던,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이 붕 떠서 신기루처럼 멀어져갑니다. 중요한 프로젝트 도중 피치 못할 사정으로 휴가를 나왔는데 프로젝트는 착착 진행되고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의 기분이랄까요? 외부에서 오는 자극들이 이렇게 하늘거리며 옅어지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만나게 될까요?     


 “몇 날 며칠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조앤은 무엇하나 숨을 수 없는 사막의 태양 아래에서 가면 아래 숨어있던 그림자와 마주치게 됩니다.   

  

2. 페르소나와 그림자 : 가면 뒤의 자신을 만나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살아갑니다. 심리학에서는 이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부르지요. 우리는 상황에 따라 천 개의 페르소나라고 일컫는 다양한 가면들 중 적절한 가면을 쓰고 관계를 이루어갑니다. 조앤의 경우, 오랫동안 변호사 남편의 현명한 파트너이자, 세 아이들에게 헌신적인 어머니, 그리고 지역사회에서 여러 모임을 주도하는 활기넘치는 지역유지 사모님의 가면을 쓰고 살아왔습니다. 어디에 내세워도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살 만한 가면이죠.     


 하지만 페르소나의 뒤에는 그림자가 숨어있습니다. 번듯한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오랫동안 억압해온 것들,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 모두 그림자입니다.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본래적인 결함 또한 가지고 있죠. 조앤의 활기넘치고 우아한 페르소나 뒤에는 자기중심적이고 타인에게 냉정한 그녀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편안한 관계에서는 애써 억누르지 않아도 되어서인지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오히려 이 그림자가 가장 많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그림자를 인정하지 않고 줄곧 타인에게 투사합니다. 아이들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하는 다음 장면을 보실까요.     


 조앤의 남편 로드니는 변호사 일보다 농장일을 천직으로 여기는 따듯한 사람입니다. 세 자녀들도 그를 무척 따르죠. 그런 로드니가 신경쇠약으로 입원하게 되자 조앤은 아이들과 충돌하게 됩니다. 아빠의 신경쇠약의 원인이 아빠를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엄마 때문이란 것을 아는 아이들은 조앤에게 각자의 성격대로 부딪쳐옵니다. 논리적인 첫째는 엄마가 변하지 않으리라 생각하기에 비꼬고 무시합니다. 앞뒤 재지않는 순수한 둘째딸은 직접적으로 엄마를 비난하죠. 막내 아들은 엄마가 원하지 않는 길을 가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앤은 자신의 결점을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첫째딸을 냉정하다, 둘째딸과 막내아들은 제멋대로고 자기중심적이다, 라고 자신의 그림자를 투사합니다. 가족의 위기상황을 맞아 자신을 제대로 보지못하고 자식들이 이제와 엄마를 희생양 삼는다고 신세한탄을 할 뿐입니다.     


 조앤은 자신이 오랫동안 만족스럽게 쓰고있는 가면을 진정한 자신이라 고집합니다. 자기 중심의 이야기 속에 자신의 결함 때문에 겪는 가족들의 고통은 들어갈 수 없죠. 자신의 부정적인 면은 일체 외면한 채 오히려 가족들에게도 자신과 같은 가면을 쓰기를 강요하며, 남편의 간절한 꿈과 아이들 각자의 다양한 가치들은 모조리 무시하고 폄하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개성도 그 과정에서 계속 억눌려왔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통제할 수 없는 사막 한가운데서 때론 두서없이, 때론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기억을 마주하던 조앤은 나흘째 되던 날, 산책길에서 사정없이 무너집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채 자신이 그토록 외면해오던 그림자를 직면하게 됩니다.『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라는 책에서는 인생의 중간항로에서 겪게되는 이 상황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누군지 충분히 알고 있으며 자신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이 무너지고 자아가 지녔던 주도권이 붕괴하면, 필연적으로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충돌한다.     


 조앤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드디어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상처를 외면했다는 사실을, 그랬기에 그들에게 줄곧 상처를 입혀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 말이죠.     


그들을 사랑했지만 알지는 못했다.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사람들을 사랑하면 그들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건데.

참된 진실보다는 유쾌하고 편안한 것들을 사실이라고 믿는 편이 훨씬 수월하기 때문에, 그래야 자신이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몰랐다.     


3.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림자를 대면한 조앤이 기진맥진해져 숙소로 돌아오자, 때마침 기차가 도착합니다. 그녀는 남편 로드니에게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기로 결심하며 기차에 오릅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집으로의 긴 여정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숨을 곳 하나 없는, 광활한 사막에서

 변한 것 하나 없는, 익숙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사샤라 불리는 우아한 러시아인 공작부인을 만납니다. 낯설고 매력적인 그녀와 이야기를 이어나가다 조앤은 자신의 내밀한 경험을 털어놓습니다. 남편과 함께 할 앞날에 대한 희망을 조앤은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 사람은 저를… 아, 뭐라고 해야 할지.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줄 거예요.     


조앤의 이야기를 듣던 사샤는 침울하게 말합니다.    

 

그건 성인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저는 이 장면에 걸려서 한동안 넘어져있었습니다. 8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온 공작부인은 과연 조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을까요?


 고민이 깊어지던 중 김진영 철학자의 『상처로 숨쉬는 법』이라는 책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이 책에서 강연자는 쉽게 힐링을 말하고, 쉽게 희망을 말하는 철학자들 혹은 종교인들에게 분노합니다. 쉽게 긍정하지 않는 아도르노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손쉬운 긍정은 진짜 문제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개인의 삶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지만 자신을 절대로 드러내지 않는 객관적 권력을 보지 못하게 은폐한다는 거죠. 이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로드니와 조앤의 갈등을 살펴보겠습니다.     


4. 슬픈 결혼 성공했지만 상처투성이인 삶     


 파트너 변호사로의 승진을 앞두고 성격에 맞지않는 변호사를 그만두고 농장을 경영하려는 로드니와 조앤은 갈등을 겪습니다. 조앤은 로드니가 파트너 변호사로써 높은 연봉을 받는 것이 가족 모두에게 행복이 되리라고 확신하죠. 로드니는 조앤을 설득하려 하지만 그녀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그의 절실한 꿈을 철없는 행동으로 치부해버립니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행복이란 곧 더 많은 연봉, 더 많은 교환가치를 뜻한다는 경제원칙,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관적 권력이 그녀의 의식 밑에 숨겨져 있었던 것이죠. 로드니는 이후 열정없는 삶을 살게되고 결국 신경쇠약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로드니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요?     


 철학자 아도르노에 따르면 가장 성대한 축제여야할 결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슬픈 결혼“으로 전락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관계에 대한 권리인 결혼이, 자기 보존을 위해 상대를 도구화하는 수단이 되었다고 말하죠. 뒤이어 결혼이 자기유지의 수단으로 전락한 데에는 이익 추구의 트릭과 책임 전가의 트릭 두 가지가 얽혀있다고 말합니다. 조앤이 경제적 영역에서 이익 추구의 트릭에 빠져있다면 로드니는 도덕적 영역에서 책임전가의 트릭에 빠져있습니다.     


 농장을 꾸려나가기 위해 대출에 목을 메는 이웃 농부를 보며 그도 결국 농사일은 고단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죠. 경제적인 유혹에 빠져 범죄자가 되는 이웃을 보며 자신의 능력으로 일군 성공에 안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몹시 지쳐있습니다. 하기 싫은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만큼 사람을 지치게하는 것이 있을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 보존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하며 버텨가는 삶, 성공이라는 열매를 쟁취한 듯 보여도 결국 상처투성이로 남은 삶이 로드니 앞에, 그리고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이런 상처뿐인 삶에서 쌓여가는 피로감을 해소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가합니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기기만이죠. 이런 책임전가는 상대를 용서할 수 없게 만듭니다. 로드니는 아내를 존중하는 듯 하지만 가슴 깊이 미워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는 가족들이 직면하는 중요한 문제들에서 아내를 소외시킵니다. 또한 진정한 관계에 대한 갈증을 아내가 아닌 레슬리라는 여인에게서 채우려합니다. 로드니는 조앤이 사회가 요구하는 자신의 아내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고 감탄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내를 아기라 놀리듯 부르며 자신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성숙하지 못한 아이로 대합니다. 이런 로드니의 태도에는 자신의 책임을 조앤에게 떠넘기기 위해 진실을 숨기고 심지어 마음 깊숙히 멸시하는 도덕적 책임전가의 트릭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김진영의 아도르노를 만나고 나니 마음을 묵직하게 누르고 있던 공작부인의 침울한 대답을 제멋대로지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기차에서 사샤는 조앤이 그토록 믿고 의지하는 남편이 오히려 그녀에게 진실하지 않다는 사실을 예리하게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남편에게서 구원을 찾으려는 조앤의 성찰이 집으로 돌아갔을 때 어떤 벽에 부딪치게 될지 사샤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5. 개인의 성찰이 부딪치는 벽     


 조앤의 굳은 결심은 집으로 가까워져가면서 점차 흔들립니다. 사막에서의 특별한 성찰의 경험이 여행길의 망상에 지나지 않을까라며 다시 의심하게 됩니다. 그 의심은 영국에 도착해서 첫째 딸을 만나며 점점 더 커집니다. 조앤의 내면의 변화에 딸은 무심합니다. 섬세하던 첫째 딸조차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 위해 엄마에게 점차 무관심해진 것이죠. 남편 로드니는 어떨까요? 로드니는 조앤의 변화를 알아볼까요? 조앤은 남편에게 자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하고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아도르노가 그러했듯이 애거사 크리스티는 쉽게 긍정하거나 쉽게 화해하지 않습니다. 한 여인의 집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따라가며, 사막의 황량한 풍경과 함께 그녀의 내면의 변화를 담담히 그려 나갑니다. 그 여행의 끝에 화해가 기다리고 있는 듯하지만 그것 또한 착각일 뿐, 개인의 깨달음이 사회의 견고한 틀, 거대한 일상의 권력 앞에서 얼마나 부서지기 쉽고 환상처럼 사라져버리기 쉬운 것인지를 냉철하지만 어쩐지 슬픈 눈으로 찬찬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결말은 제 속에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조앤의 모습은 바로 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의 그녀는 계속해서 제게 말을 걸어옵니다. 너라면 어떤 선택을 할 거냐고, 익숙하고 안온한 생의 패턴을 두고 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녀가 던진 물음 앞에서, 그 상처 속에서 오래도록 머물러 보려 합니다. 그 질문을 외면하거나 왜곡시키지 않으려 말입니다.






참고도서     

1. 시모쓰키 아오이, 애거사 크리스티 완전 공략(김은모 역), 한겨레출판사, 2017

2. 애거사 크리스티, 봄에 나는 없었다(공경희 역), 포레, 2014

3. 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김현철 역), 더퀘스트, 2018

4. 김진영, 상처로 숨쉬는 법 : 철학자 김진영의 아도르노 강의, 한겨레출판사, 2021

이전 11화 낯선 길을 방황하며 똑바로 나아가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