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긴 장마가 시작되고 있을 무렵. 해가 진 뒤 습기 가득한 공기와 뜨거운 여름의 잔열을 가로질러 아내와 나는 집 근처 도서관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모두가 시원한 곳을 찾아 방 안으로 들어가 한산한 거리였다. ‘슥 슥’, ‘슥 슥’ 소리가 들린 곳에서는 감청색 제복을 입고 경비아저씨가 빗자루질을 하고 계셨다. “아저씨 정말 더우시겠다. 돌아오는 길에 음료수라도 사다 드리자.” 걱정스럽게 아내가 말했다. 아내는 이웃 사람들을 만날 때나 혹은 경비아저씨를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하고 씩씩하게 인사를 하는 편이었다. “그래, 꼭 그러자.” 아내의 이런 따듯한 배려심이 느껴질 때면 아내의 눈에는 노란 별빛이 반짝이고는 했다.
가로등이 많이 없어 노란 달빛에 의지하며 도서관을 가는 길에는 작은 실개천도 있었고, 인공 물레방아도 있어 더위를 피하는 데는 제격인 곳이였다. 특히 형형색색 잘 가꿔져 있는 화단들은 도시안에 유일한 숨통 같이 느껴졌다. 아내가 화단 안에 제일 눈에 띄는 보라색 꽃을 보며 수국이라고 말했다. 수국은 흰색으로 알고 있었는데 평소 알고 있는 수국과는 달랐기에 아내에게 한번 더 수국이 맞는지 물어보자 아내가 답했다. “수국은 뿌리 내린 곳에 성질에 따라 색이 바뀐데.” 뿌리 내린 곳에 성질에 따라 색이 바뀐다니. 아내의 입에서 나온 ‘성질’과 ‘변화’라는 말에 흥미가 생긴 순간이었다. 마침 인공 물레방아에서 세차게 물줄기가 내려와 시원한 바람이 우리에게 불어왔다.
무더위를 잠깐 잊게 해준 인공 바람에 아내가 기분이 좋았는지 내 왼손을 쓱 하고 자신의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던 살결과 살결이 맞닿았으나 되려 시원한 기분이었다. 아내와 나는 잉어 몇 마리가 실개천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을 구경했다. 물결 위에는 수국의 꽃잎 몇 개가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는데, 물위에서 연보라색을 내고 있었다. 그 순간 노란 달빛이 물결 위를 비추었다. 연보라색 꽃잎이 달빛 가득한 노란색 수국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모습에 놀라 아내의 손을 끌어 당기며 가리켰다.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아내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잠깐의 노랑을 머금은 달빛이 사라져 버렸다. 아내가 끌어당긴 손을 풀고는 두 세 발자국 앞 서 걸어가며 말했다. “뭐야 장난하지마.” 실개천에 잉어 몇 마리가 입을 ‘뻐끔’거리며 아내의 뒤를 따라갔다.
상호대차를 신청한 책을 빌리고 난 뒤 나는 다시 집으로 향하려는 데 아내의 발걸음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아내는 “음료수 사야지. 아까 말했잖아.”라고 답하고는 씩씩하게 걸어갔다. 역시 아내의 반짝이는 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무더위는 늦은 밤까지 더 세차게 각자를 향했고 우리에게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듯했다. 도서관에 들러 책을 빌려올 때까지 경비아저씨는 여전히 아파트에 모래들을 쓸고 계셨는데, 땀에 젖어 바지의 밑단을 무릎 위까지 끌어 올리신 상태였다. 아내는 잡고 있던 손 대신 시원한 이온음료를 손에 쥔 채 아저씨에게 성큼성큼 향했다. 아내가 아저씨에게 이온음료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노란 달빛이 아내를 비추었다.
아내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다. 노란 달빛과 함께 연애를 시작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지난 여름날이 떠올랐다. 아내와 둘레길에 올랐던 적이 있었다. 둘레길 초입부터 나의 살결로 침투하는 산모기들에게 온 몸을 뜯긴 채 더위와 함께 지쳐 가고 있던 나였다. “잠깐만 기다려.” 아내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내는 둘레길 초입에서 가까운 편의점을 들러 모기퇴치제와 함께 ‘버물리’를 사왔던 것이였다. 차가운 ‘버물리’가 살결위로 칠해지던 순간 따뜻함이 느껴졌다. 아내의 망설임 없는 발걸음이 나의 마음을 또 한번 콩닥 거리게 했다.
아내가 내 눈앞까지 와서는 말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봐. 그렇게 이뻐?” 아내는 역시 망설임이 없다.
집에 돌아온 뒤 나는 인터넷으로 ‘수국’을 검색해 보았다. 파랗고 빨간 색의 농도가 달라 색이 변한 수국들을 보았다. 흰 수국, 파란 수국, 빨간 수국, 형형 색색의 수국들이 피어 있었는데 아까 본 노란빛 수국은 본 적이 없었다. 아내가 인터넷으로 무엇을 그렇게 찾아보냐는 질문에 달빛에 비친 노란색 수국이 생각나서 찾아보고 있다고 하자 아내가 말했다. “수국은 꽃잎이 잘 안 날리는게 특징이야. 그러니까 아까 그건 수국이 아닐거야.” 아내는 역시 정확하다.
실개천에 흐르던 노란 수국 꽃잎이 떠올랐다. 수국은 어느 땅에 내리느냐에 따라 색이 변화한다고 했던가. 내 눈에 담긴 수국의 꽃잎의 색이 노란색으로 변하는 순간, 어쩌면 내 안에 담긴 어떤 성질에 의해 수국이 뿌리 내려 꽃잎의 색이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아내의 반짝이던 눈빛, 시원한 살결,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 따뜻한 버물리의 추억까지. 이 모든 사랑의 기억 위로 수국의 꽃잎이 뿌리 내린 것이였을까. 여름 밤 수국의 꽃잎에 다시 한번 마음이 콩닥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