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술이 많이 부르텄네요. 무슨 일 있어요? 피곤해서 그런가. 요즘 날씨가 그렇죠. 밤에 시원하지도 않고 에어컨을 틀고 자면 춥고, 선풍기만 틀고 자기에는 또 덥고. 건강 많이 챙겨야 할 날씨이긴 해요. 며칠 전 저녁에 아내가 물회와 해물파전을 사 왔어요. 물회를 먹고 파전도 먹었죠. 혼자서 먹으면 그렇게도 느리게 먹는 음식이 이상하게 아내와 함께 먹을 때는 빨라져요. 저녁을 먹는데 그날따라 물회의 차가움이 목구멍으로 꿀떡 꿀떡 삼켜졌어요. 퇴근 후 저녁을 기다려 사 왔다는 건 그만큼 그곳이 맛집. 이런 거라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보통 물회에는 얼음 반, 야채 반, 회는 조금 일법도 한데 아내가 사 온 물회는 정말 회가 많이 들어 있었어요. 그만큼 날 것의 생선을 많이 먹은 것은 참 오랜만이었던 것 같은데, 채울수 없는 허기에 마주한 것과 같이, 물회를 정신없이 먹다 약간의 기름 진 무언가가 필요하면 해물파전을 젓가락으로 마구잡이로 해친 뒤에 무작위의 야채와 해물들을 입에 욱여넣었어요. 목이 막혀 물회가 필요할 때까지요. 새빨간 물회 국물이 메말라 바닥을 드러낼때 물회를 한 입 먹었던 순간이 떠올라요. 생선의 비늘이, 그 안에 속살을 입에 넣고 나서 어금니와 옆니 틈으로 생선 살이 파고들 때 부패된 생선의 부르튼 입이 떠올랐어요. 해 집어진 파전을 집어 입속에 넣으니 오래된 기름 냄새가, 그 기름 위로 떠다니는 불순물이 느껴졌어요. 아내와 내가 거의 동시에 젓가락을 내려놓았어요. 먹고사는 게 쉽지 않죠. 내가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순간 내 삶의 균형을 잃어버린 것 같았어요.
두툼해진 배를 부여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내 속 안에서 뭔가가 솟구쳐 나올 것 같았어요. 아내와 난 집 앞에 열대야 속의 공원을, 매미들이 오열하고 있는 저녁 밤거리를 걸어야 했어요. 걷다가 보니 집 근처에 이런 게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시선들이 다양한 곳들을 향해 멈춰 서야 했죠. 은행나무가 즐비한 가로수들을 지나 아주 이상하고 높게 쌓여 있는 벽에 당도했어요. 그 벽은 마치 옛 로마 콜로세움의 벽처럼 생기기도 했는데 그 둘러 쌓인 성벽 안에는 교회가 있었지요. 그 교회는 정말이지 내가 살고 있는 동네와 맞지 않았어요. 평소 하루에도 몇 번이고 지나치는 곳에서 발견한 교회의 성벽을 보며 깨달았어요. 너무 다르게 보이는 것도 되려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고 말이에요. 교회를 지나쳐서 걷다 보니 버스들이 나오고 들어가는 차고지도 보였어요. 차고지 안에는 버스들이 나란히 서 있었는데, 빼곡히 서 있는 가운데 이빨이 빠진 것처럼 비어있는 빈 공간이 눈에 띄었어요. 마치 죽어있는 것처럼 말이에요. 시동이 꺼져 다시는 도로를 달릴 수 없는 죽은 버스를 본 적이 있나요? 차고지를 지나칠 때쯤 다시 썩은 생선의 살결이, 비늘이 떠올라서 헛구역질이 올라왔어요. 식도를 통해 올라오는 부패된 기름이 섞인 생선들의 살점을 겨우 막고 크게 기침을 했어요. 그때 보게 됐어요. 차고지 안 빈 공간에 썬그라서를 끼고 나를 보고 우두커니 서 있는 사람을요. 아마 아내는 알고 있었을 거예요. 아내가 나를 일부러 여기로 안내한 것일 수도 있겠죠. 그 사람에게 나를 보이기 위해 말이에요. 그 순간 나는 아내가 사 온 물회를 떠올렸어요. 지금 이게 어느 한 계획의 일부인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아내가 나에게 어떤 가루를 물회에 타서 먹이고 자연스레 이곳으로 끌고 와야 한다는 계획일 거라고요. 두려웠어요. 콜로세움처럼 벽을 세운 교회의 성벽, 죽어 있는 버스들 사이에 빈 공간, 그 썩은 물회까지. 온통 못 믿을 것들 투성이잖아요.
걸음을 멈추고 나는 잠시 아내에게 핸드폰을 달라고 했어요. 아내가 이상하게 생각할 법도 했어요. 근데 아내는 휴대전화를 나에게 군말 없이 주더군요. 아내가 나오기 전에 미리 조치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내의 휴대전화를 보니 녹음기가 틀어져있다거나 GPS가 연결되어 위치 추적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했어요. 멀리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고 있는 저 사람이 분명 지시를 한 것 같았거든요. 아내에게 휴대전화를 다시 돌려주고 나는 잠깐 뛰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조깅처럼 말이죠. 가볍게 뛰어서 그들을 따돌리고 집에 들어갈 생각이었거든요. 아내에게 나는 소화를 시키기 위해 집까지 뛰어갈 거라고 했어요. 아내는 이상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어요. 아내의 살짝 갸우뚱 거리는 고개를 보았는데, 어떤 계획이 실패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 아내의 대답을 듣지 않고 뒤돌아 뛰었습니다. 콜로세움 벽이 세워진 교회를 지나,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 우리 집을 지났어요. 그때 어디선가 cctv로 나를 지켜보고 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제 오로지 믿을 것은 정말 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어떻게 버텨왔는데. 어떻게 이 악물고 버텼는데. 뛰었습니다. 또 뛰었어요. 언제부터 이 감시가 시작된 것인지 생각해야 했어요. 그때부터였나.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뀐 순간, 나는 확신했어요. 나를 멈추게 하려는 개수작 이라고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삶이 무너진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알아챘다면, 그땐 너무 늦어버렸을 수도 있어요. 이미 이건 모두 계획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현이가 나타난 건 1년 전이였어요. 그때쯤 아내는 나와 관계를 할 때마다 굉장히 아파했었어요. 정열이 없는 메트로놈을 틀어놓은 것 같은 관계를 지속할 때마다 나의 마음속 의지도 쇠약해졌습니다. 일정한 박자를 만들어 내는 것에 신물이 나있던 내 머릿속에 쾌락과도 같은 현이가 내게 나타난 거예요. 아 참 너무 내 얘기만 했군요. 근데 부르튼 입술이 너무 아파 보이네요. 침이 좀 흐르는 것 같은데 뭔가 필요하지 않아요? 괜찮다구요? 더 이야기 해달라구요? 알겠습니다. 현이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이야기해드릴게요. 우선 휴지로 그 부르튼 입술 여기 이 오른쪽 ‘닆’을 이렇게 닦고. 이런. 오른 손목 옷깃에 빨간 걸 묻혔군요. 함께 닦아 버리세요. 여기요. 현이가 처음 나타난 건 자율방범대에 지원했을 때였어요. 아내가 보통 저처럼 젊은 남자가 이런 방범대에 지원을 하면 인기가 많을 거라고 하더군요. 벌써 이 동네에 산 지도 꽤 되었고 사실 그때쯤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전까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무엇보다 내 힘으로 우리 동네의 치안 유지를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건 멋진 일이잖아요. 방범대에 가입한 뒤에는 어디서 만나야 할지, 복장 및 장비에 대해, 2인 1조로 이루어진다는 점, 특히나 법적인 한계를 유의해야 한다는 등의 교육을 받았어요. 직접 개입보다는 신고를 해야 한다는 주의사항이 눈에 띄었습니다. 주의사항을 듣고는 되려 반발심이 생기더라구요. 나의 안전을 해치는 누군가 나타나면 신고를 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직접 내 손으로 처리할 거예요. 이번 달 마지막 날인 31일에 모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저녁 8시였어요. 가벼운 복장에 휴대용 랜턴을 들고 모였습니다. 2인 1조의 짝은 그 자리에서 지어지는 것 같았어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연장자 아줌마 아저씨들이 많았어요. 자율방범대장이 말했습니다. 주의사항을 잘 기억하고 2인 1조로 짝을 지어 보라고요. 10명도 채 안된 틈에서 현이가 나타났어요. 손을 들더군요. 현이는 제 또래쯤 되어 보이는 아니 저보다 어려 보였어요.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 자율적이었습니다. 번쩍 손을 들고 나를 가리키더니 함께 짝이 되자고 했어요. 메트로놈 소리가 들렸습니다. 일정한 주기의 간격으로 떨어지는 수도꼭지로 새어 나오는 물소리가 멈추었어요. 아내와 다른 현이의 손가락이 나를 가리킬 때 지루하기만 했던 일정한 메트로놈 소리가 겹겹이 겹쳤어요. 변주되는 메트로놈 소리, 화음이 쌓이는 듯한 그 소리에 목덜미에 바짝 하고 메말라 있던 잔털들이 불뚝 섰어요. 신선한 바람이 부는 막 피어난 새싹의 향기처럼 현이가 다가왔습니다.
그날 자율방범 구역은 역의 출구에서부터 시작했어요. 현이는 제가 살고 있는 바로 뒤편에 아파트 단지에서 신청해서 왔다고 했어요. 나이도 저보다 어렸어요. 현이가 결혼을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자연스레 물어보아야 했지만 질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일부러 하지 않았어요. 변주되는 메트로놈 소리가 들렸고 어둠 속에서 랜턴에 의지한 채 현이와 걷는 길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서로의 나이와 사는 곳, 하는 일까지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하고 나니 일정한 행렬을 유지하며 따라가고 있던 행렬에서 이탈되었더군요. 아파트 단지 안에 인적이 드문 어두운 도보 안에서 자전거의 ‘딸랑’이는 소리와 함께 선글라스를 낀 어떤 남자가 지나갔습니다. 이 밤에 선글라스를 끼고 앞이 보이나? 의문이 들었어요. 앞장서 가던 현이가 랜턴을 두 번 켜 신호를 주었어요. 앞 선 행렬이 막 육교를 오르려 하더군요. 육교로 뛰었습니다. 행렬에서 이탈된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자전거에 탄 선글라스의 남자가 익숙하다는 생각도 들었지요. 일부러 행복을 느끼게 해 주고 마치 그게 행복인 것처럼 알려주고 무너뜨려 버리려는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순찰을 마치고 현이와 휴대전화 번호까지 자연스레 주고받았어요.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저녁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아내에게 왜 저녁을 미리 먹지 않았느냐고 물었어요. 아내는 저녁만큼은 같이 먹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꼭 같이 먹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지만 아내는 항상 저녁을 나와 함께 했어요. 아내가 그 말을 하니 왠지 허기가 멈추는 것 같았어요. 아내에게 가까이 가자 코 끝에서 시큼한 피 냄새가 났습니다. 아내가 김치찌개를 만드려다 옷 앞섬에 새빨간 김치의 얇은 무를 떨어뜨렸더군요. 물티슈를 아내에게 건네고 아내의 앞섬에 묻은 쉰 김치의 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시큼한 피냄새가 코 끝에서 사라지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때 식탁 옆에 있던 휴대전화에서 문자가 한 통 왔습니다. 저녁을 먹다 말고 서둘러 휴대전화를 들었는데도 아내는 그저 나를 바라보았어요. 휴대전화를 들어 문자를 확인하니 현이였습니다. 잘 들어갔냐구요. 잘 들어갔고, 저녁을 맛있게 먹으라고 했습니다. 현이에게 문자가 왔어요. 다음 달 마지막 날에 또 보는거냐구요. 꼭 보자고 했어요. 현이에게 답장이 왔습니다. 다음 주 마지막 날에 볼 수는 없겠냐구요. 밥을 먹고 있는 아내를 보았어요. 아내의 앞섬에 묻은 새빨간 자국이 보였습니다. 다시 시큼한 그 냄새가 들어왔어요. 현이에게 말했습니다. 8시 역 앞에서 보자구요. 어둠 안에서 메트로놈 소리가 들렸어요. 눈을 감으니 내 안에 변주되는 메트로놈 속 안에는 피냄새가 배어 있었어요. 어둠 안에서 ‘톡 탁’이는 소리가 수 백개로 겹쳐 들렸습니다. 자전거의 ‘딸랑’이는 소리가 귀에 울렸어요. 어둠 속에서 눈을 뜨니 아내의 뒷모습이 보였어요. 눈을 감는 순간, 입에서 피맛이 났어요. 그 순간 왼쪽 입술에 아주 작고 까끌한 무언가가 피어올랐어요.
현이와 보기로 한 저녁 시간이 다가왔어요. 아내에게는 무슨 핑계를 대고 일요일 저녁에 나가야 할까를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아. 아니 그 전날의 이야기부터 해야 해요. 토요일 오후에 아내와 내가 백화점에서 일어났던 일을 먼저 이야기해야겠어요. 아내가 백화점에서 사야 할 물건이 있다고 했어요. 아내는 좀처럼 제안을 하지 않는데 그날의 제안은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나의 주말을 침해한다는 비겁한 생각이 들더군요. 탐탁지 않았지만 차를 끌고 백화점에 가야 했어요. 백화점의 지하에 주차를 한 뒤에 배에서 약간의 뒤틀림이 느껴졌어요. 화장실이 가고 싶었습니다. 아내가 살 것이 있다는 여성용 코너는 4층이었어요. 4층에는 남자화장실이 없었기에 저는 한층 위로 올라가 화장실을 가야 했습니다. 불편감을 해소하고 에스컬레이터로 내려갔는데, 멀리서 아내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아내가 그 여자와 몇 번의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기도 하더군요. 멀리서 지켜본 아내는 내가 평소 알고 있던 아내와 너무도 달라 보였어요.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내는 마치 또렷한 목소리에 정확한 발음을 가진 여자인 것처럼 보였어요. 지휘를 하는 지휘자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에스컬레이터가 4층에 도착했을 때 아내와 함께 이야기하던 여자가 제가 다가가는 반대쪽으로 멀리 갔습니다. 빨갛고 흰 줄무늬 긴팔티에 흰 운동화였어요. 아내는 무엇인가를 사야 한다고 했었어요. 기억이 나지 않아요. 무엇을 산다고 했을까요. 반사적으로 혀가 낼름 입술 왼쪽 아래에 부르튼 시큼한 부근으로 향했어요. 아내가 말했어요 집에 가자구요. 아내는 무엇을 샀을까요. 기억이 좀처럼 나지 않아요.
현이는 8시에 딱 맞춰 역 앞으로 왔어요. 아내에게는 몸이 너무 좋지 않아 운동을 해야겠다고 했어요. 아내가 소파에 누워 눈길도 주지 않고 다녀오라고 했어요. 자연스럽게 말이에요. 한 시간 정도 일찍 나와 근처 공원을 한 바퀴 걸었습니다. 역이 잘 보이는 2층 카페에 앉아 늦은 저녁 커피를 마시기도 했어요. 사람들은 쓰기 만한 이 커피를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마시는 걸까요. 커피가 많이 팔리는 만큼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도 멀어진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아요. 커피를 마시며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을 관찰했거든요. 확인해 볼 것이 있었어요. 현이를 만나기 전에 말이에요. 현이가 손목에 있는 시계를 쳐다보며 종종걸음으로 역 앞으로 지나가더군요. 마치 내가 2층에서 쳐다보는 것을 아는 것처럼 정확하게 제 시선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걸어갔던 것 같아요. 저는 현이가 입고 있는 옷이 빨간 줄무늬의 옷인지 확인해야 했어요. 쑥색의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어요. 흰 운동화를 신고 말이에요. 8시 1분이 된 것을 확인하고 저는 2층 카페에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어요. 밖으로 나왔습니다. 현이의 앞으로 달려가려고 했어요. 지금 내 옷에 배어버린 진한 커피 냄새를 없애 줄 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쑥색의 바람막이를 입은 현이가 바람막이를 벗어 손에 걸었어요. 바람막이 안으로 현이는 빨간 줄무늬 옷을 입고 있었지요. 현이의 운동화는 흰색이었어요. 어제 아내와 있던 여자가 떠올랐어요. 현이였나. 현이였을까요? 그 순간 역 앞에 있던 현이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어요. 현이가 사라진 뒤로 무척이나 낯익은 사람이 서 있었어요. 그 사람. 그 남자가 있었어요. 낯이 정말 익던 그 남자가요.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어요.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어요. 현이가 다시 나타나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며 나를 바라보고 있어요. 현이만 보면 왜 이렇게 웃음이 나는 거죠. 그 순간 앞에 있던 남자가 사정없이 뛰어와 양손으로 거칠게 나를 붙잡았어요. 그놈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가 벗었어요. 계단 위를 올라가던 현이가 사라져 버렸어. 그놈이 나타난 순간. 생각해 보니 1년 동안이나 내 주위에 알짱이던 놈이야. 며칠 전 그 죽은 버스 정류장에서 보았고, 그전에는 우리 회사 근처에서도 보았어. 그 cctv를 통해 나를 보던 놈. 맞아 1년 전 그 주치의 놈이었어. 아내와 함께 봤던 그 의사 놈이 분명해. 날 지켜본 거야. 그 의사 놈이 선글라스를 벗고 번번이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어. 그 피어오르는 피 냄새. 약 냄새. 그놈이 내게서 무언가를 빼앗아 갔어. 내 현이를. 내 작고 아름답고 세상에 전부였던 현이를 앗아갔어. 그놈이 말했어. 기억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현이를. 현이가... 현이를 가져갔잖아. 기억 안 나? 정신 차려. 현이는 어디 있을까. 현이야. 현이야 어디 갔니. 난 왼쪽 입술을 깨물었어. 깨물고 또 깨물었어. 선글라스를 낀 그놈이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잖아. 내 왼쪽 입술에 피어난 그 부르튼 입술을 있는 대로 씹어버렸어. 곪아 터진 채 피맛이 나는 그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잖아...... 근데 당신은 누구야? 왜 낯이 익지. 당신은 누구야. 그 입술은 뭐야. 그 부르튼 입술은 뭐야. 여기는 어디지. 왜 내 왼쪽 옷깃에 이상한 피고름이 묻어 있지. 하얀 이 방은 어디였더라. 근데 왜 당신의 입에 왜. 그 오른쪽 입술에 하얗게 부르튼 그 비린 살이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