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역

by 장원석

세운은 기차역 플랫폼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2번 플랫폼을 바라보며 저곳은 기차가 좀처럼 정차하지 않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가 오늘 자주색 옷을 입었구나.’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입지 않던 자주색 옷을 입은 채 기차가 세운이 앉아 있는 플랫폼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신호음이 들렸다. 신호음은 어떤 음률을 띄고 있었는데 그 또한 낯설었다. 흉내조차 내지 못한 그 음률은 일정하지 않았는데 두근대는 소리와도 비슷했다. 세운은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기차가 혹시 다른 세상을 오가는 기차는 아닐까 생각했다.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플랫폼의 10번 정차역에서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는 아주 멀리서 빛을 내며 다가왔다. 세운은 기차가 다가올 방향을 단번에 맞추어 고개를 돌렸고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기차는 세운의 왼쪽 방향에서 다가온다. 세운이 보이는 시야의 가장 처음이자, 선로의 끝에서 기차의 머리가 보였고 곧 세운의 눈에 한가득 기차의 머리가 담길 때 쯤이었다. 세운의 발 앞으로 티켓이 한 장 떨어졌다. 티켓이 불어온 쪽은 9번 정차역 쪽이었다. 종이티켓이었다. 요즘 이런 종이티켓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던가? 세운의 머리 위로 질문이 스쳐 지났고 세운은 질문의 두 번째 꼬리를 잘라버리고는 허리를 숙여 티켓을 손에 쥐었다.

티켓은 정착지는 없었고 이름으로 추정되는 세글자가 써 있었다. 이상실. 이름이 이상실이라니. 이름처럼 정말 티켓을 상실한 셈이었다. 기차가 정확히 역에 들어섰고, 자동문이 ‘치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세운의 자주빛 옷이 플랫폼에서 사라져 기차 속으로 들어설 때 플랫폼은 여기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였고 세운은 그곳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려했다. 세운은 기차 안에서 창문으로 방금 자신이 넘어온 세상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어디였을까. 내가 시작하려고 했던 곳이었을까. 마무리지려 했던 곳이었을까. 세운은 자리에 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에 자주색 옷만이 어딘가에 걸린 채 그곳에 남아 허공에 휘날렸다.

서서히 기차가 움직였고. 10번 칸안에는 세운만이 탑승하고 있었다. 세운은 자신이 어디를 가는 것일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까 주웠던 티켓이 생각나 주머니에서 꺼내보았다. 정차역은 여전히 적혀있지 않았고, 이상실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내가 가야할 정차역을 말하는 것일까. 정차역이 상실이라면, 정차하는 것이야 말로 상실한다는 것일까. 창문밖으로 기차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상실을 향해 가고 있는 세운이 잠깐 잠이 들어 정신을 차린 건 배에서 허기가 돌 때였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나.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나. 아침일 수도 있고 야식일 수도 있다. 없어져버린 시간의 감각안에서 허기가 돌았다. 세운은 다시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이번에는 허기를 채울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뜨겁고 칼칼한 국수가 먹고 싶었다. 어묵이 몇 개 들어간. 국수의 뜨거운 국물이 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허기가 채워질 것 같았다. 세운이 기차가 움직이고 있는 방향을 등지고 반대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어떤 운명을 향해 도달하는 걸음처럼 역행했다.

9번 승객칸에는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자주색 옷을 입은 사람은 세운 혼자 뿐이었다. 9번 승객칸과 8번 승객칸 사이에 간이 식당처럼 보이는 공간을 향해 걸었고 세운이 직감적으로 이곳이 식당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문을 열자 마자 풍겨오는 음식 냄새때문이었다. 세운은 간이식당에 의자에 앉았다. 바로 앞에는 식당의 주인으로 보이는 흰 옷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세운이 그에게 국수를 파느냐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손으로 가리켰는데 가리킨 손 끝에는 무인판매기가 보였다. 무인판매기를 가리키는 식당 주인이라. 손님이 세운 혼자 뿐이었는데도 기차 안에 간이식당이 고집하고 있는 고집스러움은 지금 정착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기차와도 비슷했다. 기차는 고집스럽게 한 곳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정착지는 어디일까.

무인판매기를 누르고 메뉴에는 다행히 국수가 있었다. 국수를 주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을 무렵 간이식당에 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 중년의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었고, 그녀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무인판매기로 향해 걸어가 무언가를 주문하고 세운의 옆에 앉았다.

식당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국수를 만들 때쯤. 옆에 앉아 있던 중년의 여성이 세운을 향해 말했다. 9번에서 오셨어요? 세운은 느닷없는 질문을 받았다는 벙찐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스스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요? 저요?” 무례하게 보이는 두 번에 되물음에도 중년의 여성은 차분했다. 10번에서 오셨나봐요. ‘9번과 10번의 차이는 있을까요. 뭐 누군가에게 9번과 10번의 차이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일 수도 있겠지요.’ 세운은 멍청한 대답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침묵했다. 중년의 여성의 입에서 짧은 탄식 소리가 나왔고 뒤이어 “기억 못하시는가 보구나.”라고 말하고는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세운이 앉아 있는 자리로 뜨끈한 국물에 국수가 나왔다. 주인은 말없이 국수 그릇을 세운의 앞에 내려다 놓았다. 세운은 고춧가루가 있는지 주인에게 물었다.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중년 여성의 음식을 준비하는 것처럼 보였다. 무례하다고 느낀 세운이 크게 외쳤다. “저기요. 고춧가루가 있냐구요.” 주인은 세운을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음식을 준비했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세운은 이것이 고집이 아니라 예의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토라진 기분에 비해 국수는 맛이 제법 있었는데 뜨끈한 국물에 찰기가 있는 면이 먹을만했다. 세 번 정도 면을 젓가락으로 짚을 때면 어묵이 짚어져 나왔는데 어묵도 꽤 양이 많았다. 가라 앉은 허기를 뒤이어 질문이 생각난 세운은 잠시 젓가락을 그릇 옆으로 놓았다.

“10번에서 왔습니다. 궁금한게 있어요.” “어릴 때 좋아했던 음식이에요.” 중년 여성은 닭죽을 먹고 있었다. 궁금한게 있다는 세운의 질문에 아랑곳 하지 않고 마치 당신이 질문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전혀 다른 대답으로 세운에게 답했다. 뒤이어 중년여성이 다시 짧은 탄식 후에 말했다. “기억 못하시는가 보구나.”

세운은 불쾌감이 밀려왔다. 오늘 하루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 입지도 않던 자주색 옷. 10번 승객칸에 혼자 있던 이유. 궁금하지 않는 현재 시간. 모든게 낯선 것 투성이에 식당주인과 중년여성이 자신에게 보이는 묘한 불쾌감. 국수를 먹어서 인지 알 수 없는 호기로움에 세운이 중년여성에게 크게 말했다.

“궁금한게 있다구요. 대체 왜 아까부터 기억하지 못하냐고 하는 겁니까. 그건 혼잣말입니까. 나더러 들으라는 겁니까. 10번에서 왔고, 궁금한게 있어요. 이거. 이거 어디로 가는 기차 입니까. 그리고 이 티켓은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고는 중년 여성에게 공격적으로 내뻗었을 때. 중년 여성은 세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느닷없이 이 티켓은 잃어버린 자신의 티켓이라며 그 티켓을 자신에게 줄 수는 없겠냐고 말했다. 세운은 이상실이라고 써있던게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은 상황과 장소에서 세운은 중년 여성에게 종이 티켓을 건네었다.

세운에게 티켓을 받은 중년의 여성이 말했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가 만날 사이는 아닌 듯 하네요. 기억하지 못해 다행입니다.”

중년 여성의 말이 끝나자 기차가 어딘가에 정차했다. 말없이 바라보던 식당 주인이 손을 가리켰다. 기차가 도착한 곳은 처음 세운이 기다리고 있던 기차역이었다. 자주색 옷의 형체가 밖에서 아른거리고 있었다. 세운은 정차한 기차역에 내렸다. 또 다시 기차가 역을 향해 들어온다는 신호음이 들려왔다. 아주 멀리서부터 였다.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뚜 뚜 뚜. 박동소리가 들려왔다. 두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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