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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의 대화, 무엇이 다를까?

창조적 대화론 | 데이비드 봄

by June H


#1


대화가 필요한 순간


보통의 일상적인 대화는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이루어진다. 그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 이면에는, 마찬가지로 일상적이고도 가벼운 어떤 의도가 있다. 그래서 대화 중 던지는 질문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답변을 통해 내 행동 방향을 조심스럽게 예측하려는 시뮬레이션의 일부로 작동한다. 마치 체스판 위에서 수를 두듯, 상대의 말과 태도를 살피며 다음 수를 계산하는 방식이다. 결국 이런 대화의 목적은, 상대가 얽힌 어떤 행동을 내가 취하기 전에 상대의 눈치를 보고 조율하는 데 있으며, 그 순간 대화 속 상대의 존재는 축소된다. 나의 의도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소모품'쯤으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의 대화 또한 당연히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연결'이 될 수는 없다.


집단주의 문화가 강한 사회에서 관계는 그 외형만을 유지하기도 급급하여, 그 안에 ‘사람’은 쉽게 잊혀지곤 한다. 에픽하이의 곡 ‘빈차’의 가사처럼, '관계만 있고 인간이 낄 틈 하나 없는' 삭막한 풍경 속, 서로는 서로를 까다롭게 구는 소모품처럼 여기며, 소비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사람 간의 신뢰와 믿음, 연결은 또한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소비하며, 존재가 희미해지는 순간이 되어야 비로소 대화를 갈망하게 된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희미해진 존재를 다시 불러드릴 수 있는 그런 대화를 말이다.





#2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대화


나는 종종 나와 가까운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와는 결이 조금은 다른, 그런 대화를 할 때가 있다. 그 대화의 시작이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평범한 질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점점 대화에 몰입해 가며,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는 그런 대화를 말이다. 대화도 그렇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그 끝에 다다르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문장이 된다. 의미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문장 외에 다른 모든 것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의도를 가진 일상적인 대화의 끝에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대화를 통해 내가 원하는 의도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끌어냈다고 하더라도, 결국 남는 것은 '나와 상대가 어떤 행동을 했다'는 기억뿐이지, 대화가 남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결론을 위해 행하여진 모든 대화는, 결론에 도달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이와 달리, 진솔하고도 즐거운 대화는 대화가 목적이 되어, 대화 자체를 통해 그 안에서 새로운 의미가 떠오른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고집하고 있었구나, ' '내가 지금까지 해오던 방법과 전혀 다른 방법도 있구나, ' '상대방은 이러한 부분에서 격한 반응을 보이는구나, ' 등의 문장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의미가 대화 말미에 남게 된다. 결국 이런 대화는 나 또는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게 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대화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서로에게 어떤 새로운 의미를 생산해 내는 행위가 되는 것. 그것을 데이비드 봄은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대화라고 부른다.





#3


연결의 대화, 무엇이 다를까?


서로를 살피며, 나 자신 또는 상대방에 대한 어떤 새로운 의미가 떠오르는 대화가 곧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대화다. 데이비드 봄에 따르면, 인간 탐구로 귀결되는 이러한 대화는 흔히 우리가 의사소통 혹은 소통이라고 부르는 커뮤니케이션에 속하지만, 어딘가 조금 특별한 구석이 있다고 말한다.


사전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의 개념은 '무언가를 공통된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이란, 이론적으로 정보나 지식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가능한 정확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화라는 것에는 항상 내가 말한 것과 듣는 사람이 받아들인 것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간극이 매번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대화는, '무언가를 상대방에게 복사, 붙여 넣기를 하는 과정'이 될 수 없다. 그보다는 '무언가를 매번 다르게 받아들이는 그 간극으로부터, 전혀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함께 창조해 내는 과정'에 더 가깝다.


이는 누군가와 함께 산을 오르는 경험과 유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등산은 서로 다른 일상에서 출발하여, 같은 산을 오르는 일이다. 함께 걷고 오르다 보면, 때로는 가파른 오르막에서 숨이 차오르고, 때로는 험한 바위틈에 멈춰 서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숨을 고르게 된다. 또 어떤 순간에는, 펼쳐진 자연의 아름다움에 압도되기도 한다. 그렇게 느려졌다가 빨라지는 걸음 속에서, 서로의 호흡과 리듬에 익숙해진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산을 오르며 각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던 풍경은 같은 하나의 장면으로 수렴한다. 그 순간, 서로의 마음속에는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어떤 공통된 감각이 떠오른다. 누군가는 '후련하다'라고, 다른 누군가는 '상쾌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감각을 말이다.


어쩌면 커뮤니케이션으로서의, 소통의 대화는 높지 않은 산의 정상에 오르는 것처럼, 생각보다 할 만한 것일지 모른다. 정상의 기쁨을 기대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 여정 가운데 나와 상대를 너그럽게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지만 않는다면, 그 대화의 끝에서 분명, 이전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눈동자 너머, 서로의 존재를 새롭게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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