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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pr 21. 2022

이슬람 문화의 기원

이집트, 이란 그리고 정교일치

 

<이슬람 문화의 기원>

기원전 3000년경에 발달한 이집트 문명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대표된다. 

매년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 강변의 비옥한 땅을 중심으로 

세계 최고의 고대 문명이 이집트에서 번성했다. 

 

카이로의 기자에는 이집트 문명의 상징인 세 피라미드가 

스핑크스를 앞에 두고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고대 이집트 절대 군주인 파라오의 묘로서 크기대로 쿠푸, 카프라, 멘카우라의 것이다. 

4500년 전에 축조되었고 20만의 인부가 20년에 걸쳐 공사했다고 전해진다. 


피라미드 근처에 있는 오아시스 마을 토담집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미라로 만들어 놓은 자신들의 조상을  
 관광객에게 구경을 시켜주고 사진을 찍게 하고는 얼마간의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파라오 중심의 역사에서 이집트 대중의 시대가 열렸던 곳은 

바로 테베, 오늘날 룩소르 일대이다. 

3500년 전 나일 강 상류에 꽃 피웠던 왕묘와 신전의 도시, 

이집트 문명의 혼과 대중적 신화가 살아 숨 쉬는 룩소르를 뺀 

이집트 방문은 별다른 의미를 갖자 못한다. 

 

룩소르에서 차로 5시간 거리에 위치한  아부 심벨 대신전은

언제나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람세스 2세는 태양신 아몬-라와, 창조신 프타,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이 거대한 신전을 건립했다. 


무엇보다 아부 심벨 신전에 남다른 애착이 가는 이유는 

물속에 잠겨 있어야 할 이 위대한 인류의 축조물이 지상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 댐을 건설했을 때 

아부 심벨도 나일 강가에 있는 무수한 신전과 함께 수몰될 운명이었지만 

유네스코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서 

신전을 원래의 위치보다 60m 높은 위치로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페트로폴리스, 이란>

페트로폴리스는 기원전 2,500여 년 전에 건설된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이다.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2시간이면 고대 도시 시라즈에 도착하고, 

자동차로 동쪽으로 1시간을 달리면 잠시드에 도착한다. 

이곳이 페트로폴리스의 현지명이다.


장엄한 도시 페트로폴리스는 

기원전 518년 다리우스 대제에 의해 건설되었고 완성까지는 100년이 걸렸다. 

사치와 향락, 호화로운 파티가 연일 계속되었던 페트로폴리스의 운명은 그렇게 길지 못했다. 

기원전 330년 페트로폴리스에 도착한 

알렉산더 대왕은 이 놀라운 번성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철저히 파괴하고 불태웠다. 

182년간의 짧은 생애였다. 

그리고 2260년 동안 망각 속에 묻혀 있었다.  


1931년부터 시카고 대학의 동양연구소 고고학 팀이 본격적인 발굴과 복원을 시작하면서

 페트로폴리스의 역사적 의미가 되살아났다. 

 

페트로폴리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아파다나 궁이다.

 왕들의 대접견장이었던 이 건물은 72개의 기둥 중에 지금은 13개만 남아 있다. 
 세르케스궁 역시 빼놓을 수 없는 화려한 건물로 19m 42cm 높이의 일백 개의 열주로 꾸며졌으나 

이제 몇몇 기둥이 그 흔적을 전해줄 뿐이다. 


<정교일치의 이슬람>

기독교나 불교 등 대다수의 종교가 세속적 삶보다는 내세를 강조하고

인간생활의 육체적인 면보다 정신적인 면을 중시하는 데 반해, 

이슬람은 현세의 삶을 내세의 삶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무슬림들에게 정치와 종교의 일치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찍이 서구인들은 무슬림에 의한 정복사업을 

소위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슬람의 호전성과 종교의 강압적 전파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그들이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확산되는 

이슬람 세력에 대한 위기감에서 만들어낸 용어에 지나지 않는다. 


이슬람은 발생한 지 100년도 안 된 짧은 시간 동안 

지금의 중동은 물론 북아프리카부터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인도, 중국을 비롯하여 

스페인을 위시한 유럽까지 점령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칼이 아니라 

여러 사상과 문화를 수용하고자 했던 관용성이었다. 


이슬람이 빠른 시간 내 정복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당시 침체된 아라비아 일대의 상업과 목축업이 늘어나는 이슬람 공동체의 생존에 충분치 못하여 

이주자와 비옥한 경작지의 획득, 공납지의 확대, 안정된 교두보의 확보 등이 

절실히 요구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비잔틴과 페르시아 제국의 끊임없는 교전으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졌고, 

양 제국의 강압적인 통제 정책과 과중한 조세 수탈은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다.

이에 반해 이슬람교는 새 정복지에서 살육과 직접통치보다는 

공납과 간접 통치를 선호하였는데 

이 정책을 정복 주민들이 환영했고 

이로써 무혈 정복사업은 성공을 거두었다. 

 

이슬람 문화가 빠르게 전파된 이유는 특유의 융화력 때문이다. 

아랍인은 정복을 통하여 인도와 중국의 경계선 지역, 그리스, 이태리, 및 

프랑스의 변경 지역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을 통합하였다. 


이 방대한 지역을 한 동안은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통하여, 

그 후 오랜 기간 동안은 아랍어와 이슬람 종교를 통하여 

한 덩어리로 묶어 놓았다. 

이러한 융화력과 관용성으로 형성된 이슬람 세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역사학, 지리학은 물론 

철학, 천문학, 대수학, 물리학, 화학, 연금술 등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중세 유럽이 암흑의 상태에 있을 때에도 

세계 문화 정체를 막았으며 

이슬람 학문과 과학은 유럽에 전파되어 르네상스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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