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이야기(5)

아랍에미리트 & 사우디아라비아

by 산내

<아랍에미리트>

세이크 자이드의 고향은 아랍에미리트 연합의 수도 아부다비다.
1962년 아부다비의 석유수출이 늘어났지만,

사크부트는 국민과 국가의 발전을 위한 과감한 투자를 하지 못했다.

결국 진전이 없는 사크부트의 답담한 행보에 불만을 품은 자이드는 가족들의 지원에 힘입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켰고 1966년 8월 사크부트가 거머쥐고 있던 통치권이 동생 자이드에게 이양되었다.


19세기-20세기에 걸쳐 영국은 걸프 아랍 지역의 수호자 역할을 자처했지만

1968년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아라비아반도에서의 철수를 발표했다.
그 후 아랍 토호국들의 독립 정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이때 아부다비 통치자 자이드가 토후국들의 연합을 통해 국가를 수립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3년간의 논의 끝에 아홉 토호국 중 카타르와 바레인을 제외한 일곱 토호국이 연합하기로 뜻을 모았다.


아부다비, 두바이, 샤르자, 라스알카이마, 아즈만, 푸자이라, 움무 알쿠와인이 연합해서

1971년 12월 2일 새로운 국가, 아랍에미리트 연합 건국을 공표하였다.

세이크 자이드가 통치했던 33년간 아랍에미리트는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급격한 발전을 이루었다.

1971년부터 2004년까지 그의 통치 기간에 아랍에미리트의 GDP는 약 10배 성장했다.
그러나 그의 후손 아랍에미리트 인들은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보다는

그가 물려준 정신적 가치를 더 소중히 여긴다.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국민들이 길을 잃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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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나아갈 길을 알려준 ‘참된 아버지’ 라 칭송한다.
국민은 자신이 속한 토호국의 통치자를 아버지로 여기고 그의 비전과 계획에 순종하며

국가의 발전을 염원한다.
그 밑바탕에는 영원한 정신적 아버지 세이크 자이드가 있다.

이것이 아랍에미리트 국민이 가진 애국심의 원천이다.




<사우디 아라비아>

1902년 성인이 된 압둘 아지즈는 자신의 군사를 이끌고

아라비아반도 중앙에 위치한 나즈드 지역으로 향했다.

11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라시드 가문에 빼앗겼던 지역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아라비아반도에는 수많은 부족과 가문들이 각자의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몇 년 사이에 압둘 아지즈는 이들을 하나 둘 정복했다.

오랜 기간 성채에 거주하면서 태평해진 다른 부족들은 수년간 칼을 갈았던

사막의 전사 압둘 아자즈 앞에서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리더십을 통해 다른 부족들로부터 충성 서약을 받아낸 압둘 아지즈는 정략결혼을 통해

서우드 가문을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반도의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들어 갔다.
압둘아자즈는 22명의 아내를 통해 45명의 아들과 수십 명의 딸을 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32년 사우디를 건국한 압둘아자즈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건강이 악화되었다.

1953년 압둘 아지즈가 서거한 후, 장남 투르키가 1919년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사우드가 국왕이 되었고 동생 파이살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경제관념이 없는 데다 사치를 좋아했던 사우드는 석유 수출로 들어오는 돈을 물 쓰듯 썼다.
사우드가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사우디는 경제적 파탄 상태에 이르러

국제통화기금 차관을 끌어 써야 하는 지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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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1월 사우드 가문의 연장자들은 공항에 모여 사우드를 폐위한 후

아테네로 떠나는 사우드와 작별인사를 나누었고 파이살이 지위를 이어받았다.
파이살은 돈을 모을 줄도 알고 지혜롭게 쓸 줄 아는 지도자였다.

왕위에 오른 그는 형이 망쳐 놓은 국가 경제를 살리기 시작했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주저하지 않고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파이살 국왕은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짧은 기간에 사우디의 근대화를 이룬 후

안타깝게도 왕궁에서 조카에게 암살당해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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