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1)

커피 노동자

by 산내



<브라질 커피 노동자>

노예수입이 금지됨에 따라 1850년 이후부터 커피 재배업자들은

노동력 충원을 위한 대안들을 시도했고,

첫 번째 시도한 것이 유럽인 이민자들의 유인이었다.


농장주들은 이들 유럽인 이민자들에게 이주 교통비를 대신 치러 주고

살 집을 제공해 주고 재배·수확·가공할 커피나무의 수를 구체적으로 할당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먹을 식량을 키울 수 있게 작은 땅까지 내주었다.
한편 소작인들은 이주 교통비로 진 빚 외에 그 밖의 가불금을 갚아야 했다.



이민자들이 빚을 모두 갚기 전에 농장을 떠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런 시스템은 채무노예나 다름없었다.

다시 말해, 또 다른 형태의 노예제였다.

따라서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1856년에 급기야 스위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1884년에 파울리스타 농장주들이 마침내 정부를 움직일 만한 정치적 영향력을 쟁취하면서,

새로운 노동자들이 미리부터 채무의 짐을 떠안은 채 브라질 땅을 밟지 않도록

이민자들의 이주 교통비를 브라질 정부가 대신 내주게 되었다.

대부분이 가난한 이탈리아인들이었던 이들 해외 이주민들이 상파울루의 농장으로 물밀듯이 몰려왔다.


1884년부터 1914년 사이에 브라질 커피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들어온 이민자의 수는 1백만 명이 넘었다.

이 중에는 더러 고생 끝에 자신의 땅을 획득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돈만 겨우 모았다.


열악한 작업환경과 생활환경 탓에 대다수의 농장에서는 무장경호원을 두기도 했다.

실제로 엄청난 증오의 대상이던 프란시스쿠 아우구스토 알메이다 프라도는

경호도 없이 자기 소유의 들판을 거닐다가 해외 이주민들에게 토막토막 난도질당하는 참변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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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상황>

과테말라의 여자 노동자들은 빈곤 속에서도 행복해하는 법을 이따금씩 잊어버린 채,

대대로 훈련받아 몸에 밴 복종을 어떤 식으로 든 극복 해 내곤 했다.


여자들은 감독관들로부터 툭하면 성적 착취를 당하기도 했는데,

이런 불만제기가 종종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격이 되기도 했다.

한 여인이 농장의 관리자에게 강간범 체포 비용을 전가받아 빛만 더 늘었던 경우처럼

결과적으로 과테말라에서 커피는 변덕스러운 외국시장에 대한 의존성을 촉발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압적인 경찰국가, 심각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 원주민들의 사실상의 노예화 현상을 유발했다.

패턴은 판에 박은 듯 똑같았다.


대단지 농장의 소유자인 라디노나 독일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호시절을 틈타 돈을 왕창 벌어들였지만

실제로 그 농장이 굴러가도록 땀방울을 흘리는 이들은

인근 고지대에서 억지로 이주해 온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상황이 몇 년에 걸쳐 이어지자 폭동, 불만 유혈 참사가 거듭되었다.


한 라틴아메리카 역사가가 썼던 글처럼,

과테말라에서 정부의 정책을 짧게 요약해서 말하자면 언론 검열,

반항자들에 대한 국외 추방과 수감 경찰의 엄격한 통제, 쇠약하고 비굴한 국가 관료,

대단지 커피 재배 가문과 유착 관계인 이들의 수중에 맡겨진 재정과 재무 문제,

외국계 회사에 대한 관대한 대우가 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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