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와 카사노바
이탈리아에는 세계적인 관광지가 많이 있지만 '물의 도시'로 알려진 베네치아 역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유명한 관광지다.
베네치아를 잘 아는 이탈리아인은 이렇게 충고한다.
“베네치아에서는 절대로 말끔한 레스토랑엔 가지 마.
다 뜨내기손님 위주라 비싸기만 할 뿐 맛이 없어.
베네치아 사람들이 가는 레스토랑들은 허름한 구석에 숨어 있어."
그리고 그는 베네치아의 본모습을 볼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알려준다.
"카사노바의 흔적을 찾아 여행하면 오히려 베네치아의 숨겨진 모습들을 보게 될 거야.
무라노의 아름다운 유리 공예도 볼 수 있어.”
그리고 베네치아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면 당황할 수밖에 없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바닷물로 이어진 운하에 놀라고,
너무도 많은 사람에 놀라고,
바다 냄새에 놀란다.
수천 번 베네치아를 꿈꾸었지만 이곳에서 바다 비린내가 날 것이라고 상상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베네치아가 부산이나 인천과 다름없는 항구도시이고 교역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수백 번도 더 읽고 들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치 톱스타는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베네치아는 암수 두 마리의 뱀이 서로 입을 벌려 끼어 맞추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암수의 나사가 서로를 조이고 있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런 풍수지리가 카사노바 같은 인간을 낳은 것은 아닐까.
기차가 닿는 산타루치아 역은 뱀의 콧구멍 같은데, 저 멀리 육지로부터 온 기차가 이곳의 끝자락에 사람들을 내려놓으면 긴 혓바닥으로 바다를 향해 빨아들이는 것 같다.
사람, 사람, 사람의 물결에 출렁이는 운하의 탁한 진녹색 물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아 또 놀란다.
큰 목소리로 호객하며 노래까지 부르는 곤돌라 아저씨들은 한국의 역전에 흔히 있는 장거리 택시 기사들과 다를 바 없다.
게다가 알려준 숨은 장소들을 찾으려는 시도는 곧 포기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자동차도 다니지 못하는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의 연속인 이곳에서 지도는 해독이 불가하고,
택시라 표시된 것은 곤돌라를 의미한다.
즉 곤돌라를 타고 운하를 따라가다 어느 한 지점에서 내려 걸어서 주소지를 찾아가야 한다.
위도가 높아 가을에는 4시만 넘으면 해가 뉘엿거리는 이 도시의 미로와 같은 골목 사이에서 어떻게 그 장소들을 찾는단 말인가.
베네치아에서는 조금만 넋을 놓고 있다 보면 인파 사이에서 그냥 밀려다니다가 하루를 보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카사노바의 길'을 찾아보는 게 좀 더 수월해 보인다.
카사노바는 귀족 태생이 아니었지만, 명성만으로 신분상승을 해 사교계를 드나들며 18세기 유럽 사회의 정치, 문화를 섭렵하고 귀족, 왕족, 지식인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무엇보다 여성과 자유를 사랑한 카사노바는 육체가 원하는 욕망을 존중했다.
그런데 카사노바는 바람둥이라는 얄팍한 명성과는 달리 파도바 대학에서 그 어려운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젊은 시절 최초의 직업이 성직자였다는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후 외교관과 로비스트의 길을 걸었고 음악과 비즈니스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으며,
지구를 움직이는 비밀결사 조직이라는 프리메이슨의 단원이었다.
여기에 더해 1798 년 눅스 섬에서 눈을 감을 때까지 수학· 의학 서적 등과 소설까지
40여 편의 책을 남겼는데, 그중에서도 자서전인 <나의 인생>은 18세기 유럽 상류층의 문화를 생생하게 전해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카사노바에게는 이중적인 면이 있고, 두 면을 모두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오늘날까지 그를 바람둥이로만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자서전의 영향이 컸다.
바람둥이야 어느 시대 건 있었고 말하지 않으면 모든 비밀이 무덤 속으로 들어갈 텐데,
카사노바는 이 책에 너무도 사실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
물론 그에게 있어 유혹의 기술이란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듯 삶을 완성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였던 것만은 확실하지만.
진정한 바람둥이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여성들의 지탄보다는 동경을 받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바람둥이들이 가진 재주에도 특별함이 있는 것이 아닐까?
관광지로서의 베네치아의 유명세에 버금가는 카사노바의 이름 또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베네치아 출신이라 아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