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초년생 시절 나에게 꿈이 있었다.
그 꿈은 내 명의로 된 집을 가지는 것이었고, 한 채의 집만 있으면 욕심없이 세상을 살 것 같았다.
신혼 초, 아내와 나는 부천 중동에 위치한 2층 단칸방에 세 들어 살았다.
강남에 있는 직장을 오가기가 힘이 들었지만, 없는 살림에 그나마 감지덕지 했고, 신혼시절이라
그마저 고맙고 힘든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 반기는 아내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사정 이야기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을 느꼈다.
부산에 계신 어머니가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았고, 서둘러 수술을 해야 하는데,
입원하면 가족을 보살필 사람이 없어 병원에 가지 않으신다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한동안 숨이 쉬어 지지 않았다.
힘들어 하는 나에게, 아내는 서울생활을 접고 부산에 내려가 어머니 병을 치료하자고 하였다.
살아갈 길을 걱정하는 나에게 던진 아내의 한 마디는 충격적이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대장부가 무슨 걱정을 그리 합니까? 직장은 다시 구할 수 있지만,
한 번 가신 부모님은 다시 올 수 없습니다.”
그날로 우리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부산으로 내려와 부모님과 같이 생활했다.
그 후, 어머니는 두 번의 수술을 받았지만, 암이 임파선을 타고 온 몸에 전이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시다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나는 꿈을 꾸었다.
돌아 가긴 어머님이 나타나 숲속 길을 지나 깨끗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집에서 살라 하셨다.
내 집이 아니라 말하니, 너희들이 조상님을 잘 모셔 주는 것이니 잘 살라고 하셨다.
어머님 꿈을 꾸고 몇일 후, 나는 작은 아파트 분양을 받았다.
모델하우스를 들어선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방의 벽지와 거실의 장판이 꿈에 본 것과 정확히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여유 돈 한 푼 없이 분양 받은 아파트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중도금과 잔금을 치르고,
입주일자가 되어 이사를 했다.
이사한 날 저녁, 나는 그날의 행복했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거실에서 둘러본, 24평 아파트가 한없이 넓어 보였고,
이 넓은 공간이 나의 소유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거실에서 보이는 작은 방 끝이 까마득히 멀어 보였다.
그 순간은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고, 최고의 부자였다.
어머님이 선물로 주신 그곳에서 우리 가족은 더 없이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세월이 흘러, 홀로 되신 아버님과 성장한 아이들이 같이 생활하기 위해 조금 더 큰 공간으로 집을 옮겼다.
우리 가족이 떠난 어머님의 선물은 마음이 따뜻한 분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어머님이 주신 선물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모든 것이 행복 했고 감동적 이었다.
어머니 좋은 선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많이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